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중심으로하는 유민화가 사승(四僧)은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대담하게 개성을 표현하여 창조적인 경향을 띠는 혁신적 개성주의 화가들이 있다. 또한 중기에 이르면 북경과 양주 두 곳이 회화의 중심지가 되는데, 북경은 사왕과 운수평의 화풍을 이어 경직되는 방향으로 회
石濤), 석계, 매청, 공현, 사사표, 홍인, 전산을 말한다. 이들 중 홍인(弘仁: 1610~1644)과 공현(賢: 1620~1689)처럼 극단적인 대비를 보이는 화가도 없을 것이다. 안휘(安)의 승려인 홍인은 위기를 초월함으로서 어려움을 맞서나갔으며, 예찬(倪瓚)의 산수화에 가까운 탈속적인 순수한 분위기를 뿜고 있는, 허약
청 초 화단에서 사람들의 이목을 일신시킨 것은 석도石濤와 팔대산인八大山人을 수장으로 하는 일군의 창조적인 화가들, 즉 회화사에서 명의 유민화가遺民畵家라 불리는 화가들이었다. 석도와 팔대산인은 서로 달랐다. 팔대산인은 그의 기이한 그림으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지만, 그가 왜 그
Ⅰ.머리말
18세기 청(淸)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안정을 이루었다. 이러한 번영의 시기에 강소성 양주 역시 염업을 바탕으로 한 상업자본이 형성되어 많은 상인들이 모여들고 신흥도시로 발돋움했다. 상인들 중에는 문학과 예술에 관심을 보이며 예술가들을 후원하는 자들도 있었고, 예술가들의 예술
동양화론 청대 회화
사승화가에 대하여
사승화가
1644년 북경이 함락되고 만주족이 세운 청이 명왕조를 대치하였지만 1680년까지 한족의 많은 문인들은 이민족의 정복에 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거나 몰락한 명의 유민으로 남아있었다. 청의 지배를 거부하며 승려가 된이들로써 모두 개정적인 양식을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