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제1편 원시고대사회의 발전
1.고대사회의 발전
1) 석기와 금속시대의 비교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시기
약 50만년 전
B.C. 4000년 전
B.C. 1000년 전
B.C. 400년 전
토기토기 없음
전기 : 원시 무 문 토기, 후기 : 즐문토기(빗살무늬토기)
무문 토기(무늬
Ⅰ. 개요
문화의 발달은 공예품의 종류와 사용되는 재료의 다양화를 가져오나 흙이야말로 지역이나 시대에 관계없이 가장 긴요하게 사용된 재료였다. 삼국시대에는 흙을 이용한 토기, 즉 일상생활에 있어서의 용기의 제작이 본격화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건조물(建造物)에 사용되는 와전의 성용(盛
빗살무늬토기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는 계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석기시대 후기에는 중국계 신석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퉁구스계의 종족이 채도문화와 농경문화를 수반하면서 만주로부터 이주하여 들어와 변형빗살무늬토기를 만들면서 계승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우리 한민족의 모체는 신석기
토기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빗살무늬토기라고 불리 우는데 토기의 겉면에 빗 같은 무늬새기개를 이용해 만든 기하학적인 무늬를 배합하여 각종 무늬를 넣었기에 빗살무늬토기라는 명칭이 붙었다. 그 후 청동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민무늬토기라고 불리 우는 무늬가 없는 토기가 나타나기 시작하
4. 토기의 발생과 확대(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최근 고고학적 연구 결과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토기의 발생을 특징으로 하는 신석기시대의 시작을 기원전 6000-5000년 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빗살무늬토기를 처음 만들어진 토기로 보고 그의 발생연대를 기원전 4000-3000년경으로 추정해왔던 종
토기들이 함께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오산리 유적 일대가 남부와 북부의 접변지대인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오산리에서 출토된 덧무늬토기는 그 연대가 기원전 5,100여년으로 나타나서 오산리 유적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덧무늬토기가 빗살무늬토기 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는 것을 입증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士器]로 양식에 있어서 함북지역과 기타 지역의 2가지로 구분되며, 유사성도 있으나 차이점이 더 많다. 황해안과 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결이 고운 사질토(砂質土)에 활석과 석면을 보강제로 섞었고 무늬에는 대개 사단선무늬[斜單線文]․ 어골무늬[魚骨文] 등이
Ⅰ. 서론
우리 민족이 걸어온 고고학적 특징은 중요하다. 우리 민족은 현재 한반도를 삶의 주된 터전으로 삼고 있지만, 원래는 여러 경로를 거쳐 이동해 와서 오늘에 이르렀다. 우리 민족이 이동한 경로를 밝히면 우리 민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하는 실마리가 자연적으로 풀리게 된다. 우리 민족
토기는 구연부에 짧은 횡주어골문이 압인된 원저 半卵形의 영선동식토기로 대표된다. 수가리식토기로 대표되는 다음 단계의 침선문토기에는 구연부에 단사선문․조대문이 시문되고 동부에는 횡주어골문이 시문된 토기가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중서부지방 즐문토기와 연결되나 무늬의 선이 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