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에 사용된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士器]로 양식에 있어서 함북지역과 기타 지역의 2가지로 구분되며, 유사성도 있으나 차이점이 더 많다. 황해안과 남해안지방의 빗살무늬토기는 결이 고운 사질토(砂質土)에 활석과 석면을 보강제로 섞었고 무늬에는 대개 사단선무늬[斜單線文]․ 어골무늬[
토기 문화와의 상대적 관계와 토기의 개별성을 추측하게 한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는 한반도의 북부지방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청동기와 무문토기에 의하여 빗살무늬토기는 점차소멸하고 한반도는 무문토기를 포함한 청동기문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의 토기는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와
토기층 밑에서 출토되어 즐문토기보다 먼저 발생한 것이 입증되었다. 융기문토기는 남해안 바닷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아무르강 유역과 松嫩平原 일대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융기문토기의 중심연대는 기원전 6천 년기에 해당하나 상한과 하한은 좀더 연장될 것이
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의 선사시대 및 원삼국시대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지만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의 유물은 그리 많지 않고 전시유물의 대부분은 초기철기시대와 원삼국시대의 유물들이다. 이 전시실에는 지금까지의 고정된 전시개념에서 벗어나 여러 가지 토기들을 한 곳에 모아 전시함으
신석기 유적지는 15개소 정도이다. 주로 해안과 소하천변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정식으로 발굴, 보고된 것은 3개소에 그치고 있다. 패총(貝塚)유적이 1개소, 유물포함층이 2개소이다.
서생면 신암리는 소하천이 바다로 유입되는 곳이다. 일찍이 일본인 학자가 즐문토기의 존재를 보고한 바 있고, 19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