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동휘의 생애
1.1 이동휘 1873~1917
1873 함경남도 단천 출생. 18세 때 통인, 23세에 상경하여 한성무관학교 입학. 졸업 후 한성근위대에 근무, 부위 승진 후 궁궐수비대장, 참령으로 승진한 후 삼남검사관
1902 강화도 분견진위대장에 임명 후 합일학교(合一學校) 설립하였다. 이 무렵 개혁당에 가
1995년, 성재 이동휘가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이는 이동휘를 비롯해 그동안 사회주의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외면당했던 만주·연해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재평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과 뒤이은 냉전체제의 몰락은 반쪽에 불과했던
이론이요, 뒷것은 직접적인 무장 투쟁의 이론이 되는 셈인데 안창호가 앞이론의 대표자라면 이동휘 장군은 뒷 이론을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1919년에 삼일 운동이 일어나고 나서 그 해 5월에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만들어져 안창호나 이동휘가 ㅈㅇ요 부서를 맡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1. 머리말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항거하는 전민족적․혁명적 항일봉기였던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 식민지 민중들에게 사회주의사상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특히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의 물결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거센 파도처럼 밀려들어와 식민지 지
이동휘, 김립, 전일 등의 협력으로 케렌스키의 사회당과 연락하고 있었다. 당시의 시베리아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악화일로에 있어서 볼세비키들은 일본군을 동지역에서 구축(驅逐)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반일적인 세력과도 손을 잡아야 할 형편에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군인출신인 이동휘가 시베리아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군무총장 노백린,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문창범, 노동국 총판 안창호를 각각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해임정의 정부개조는 대한국민의회로부터 통합 합의를 이끌어 내었던 통합안과는 다른 것이었다. 주지하
이동휘)하고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였다.(1919. 4. 13)
국내에서도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3 1운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33인의 사업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한남수 김사국 등 24인이 ‘13도 국민대표자’에 의한 임시정부 수립을 비밀리에 추진한 끝에 ‘국민대회취지’와 6개조 약법(略法)이 명시된 <
이동휘, 중도세력의 김규식, 우파세력의 안창호를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 13일 한성임시정부와 통
이동휘(李東輝),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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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치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하여 설립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서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하였으며,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