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벌은 한반도에서 왜구를 근절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그 후 대일 외교체제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이런 면에서 대마도 정벌은 조선전기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고 왜구의 실체와 대마도정벌이 한일관계사에 끼친 영향 등 아직도 규명되지 않은 문제
정벌할 의사를 표하고 조선 국서를 보냄
[일본왕이 왜구를 단속하지 않고 우리 강토를 침탈하고 명 태조의 영정을 벽에 걸어놓고 눈을 찌르는 만행을 일삼고 있으니 짐은 병선 1만 척을
징발하여 이들을 토벌하고자 한다. 너희 조선에서도 이를 미리 알아둠이
마땅할 것이다.] ☞ 태종실
2. 일본정벌의 전개과정
<제1차 침략의 패배>
충렬왕 즉위년인 1274년 10월 제1차 일본 침략이 개시되었다. 몽한 연합군 2만 5,000명, 고려군 8,000명, 사공과 뱃사공, 수리공 6,700명으로 이뤄진 대규모 부대였다. 3만여 명의군사들은 합포에서 900여 척에 나누어 타고 쓰시마 섬을 향해 나아갔다. 초기의 전세
Ⅰ. 개요
전쟁의 와중에 일본에 이식된 주자학적 세계는 17세기 초반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林羅山은 주자학의 입장에서 반불교적 기치를 내걸고 계몽활동에 앞장섰다. 당시 林羅山이 주자학의 경전을 강의했을 때,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룰 정도였다. 이러한 주자학적 사고는 당시 성
우리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전부터 다른 나라의 침략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는 북방에 위치한 중국이라는 거대한 국가와 결코 무관하지 않은데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상 과거의 수많은 침략들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
만주 혹은 간도에 대한 애착은 쉽게 버리지도 못하고, 일정부분 현상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측면도 간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본고에서는 대외관계사의 측면에서 이와 관련하여 조선후기 북변외교에 중요한 화두들 중 대표적인 '나선정벌'과 '백두산정계비'에서 다루어보도록 하겠다.
Ⅰ. 문제 제기
위화도 회군과 조선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역사과정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가. 위화도 회군을 통한 개혁정치는 시대 변화에 순응하고 역사 발전에 기여 했는가, 아니면 구호에만 그친 허구의 지배 이데올로기인가.
Ⅱ. 위화도 회군 전후의 정세
1. 고려 말의 상황
고려
Ⅰ. 서언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대한 우리나라의 연구는 상당히 소홀하다. 개설서나 교과서에도 사실을 중심으로 간단히 다루고 있는 정도이다. 그 이유는 일본 정벌이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쟁이며, 원의 식민지 간섭을 받았던 고려가 불가피하게 전쟁에 동원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경
정벌을 재개한 쿠빌라이는 1279년 긴 전쟁 끝에 넓고 비옥한 남송의 토지를 복속시켰다.
(2) 남송 정벌
대칸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 앞에 가로놓인 문제는 무엇보다도 먼저, 송과 체결한 조약을 이행토록 하는 일이었다. 이것을 위해 쿠빌라이는 학경(郝經)을 송에 파견하여 즉위를 알리는 동시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