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
칭기스칸이 만들어 가는 세상의 질서에 동참하는 일, 거기서 맛보는 미래에 대한 기대가 그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일깨워주고 그들 스스로의 삶을 값지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후회 없이 말을 달렸다. 그리고 그들은 질주가 가로막힐 때마다 격렬한 전투를 피하지 않았다.
관계 지속, 요와의 외교 관계 수립 지연
현종 친조 불이행
강동 6주 반환요구
경과
서희의 외교담판
요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
결과
강동 6주 획득
압록강까지 영토 확장
현종이 친조를 조건으로 퇴각,양규가 귀주에서 격파
귀주에서 강감찬에게 섬멸당함
친조(親朝)를 약속하고 또 다시 강화를 성립하였다. 이에 따라 다른 조건들은 수행하였으나 국왕의 친조는 이행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강화조건을 모두 수행하지 않은 가운데 고종34년(1242)에 몽고의 4차 침략이 이루어졌으나 몽고 내부적 문제로 인해 곧 회군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몽고와의 전쟁에서
친조(親朝) 요구는 고려로서는 국가의 체면상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이에 왕은 병을 빙자해 친조의 불가능함을 통고하자, 요는 앞서 고려가 차지한 강동 6 주를 반환하라고 요구하여 왔다. 고려는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요와 국교를 끊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요에서도 1014년(현종 5)부터
1235년 탕구를 사령관으로 침략해왔다. 탕구는 고려조정과는 아무 교섭없이 닥치는 대로 전국토를 유린하였으며 이때 황룡사 9층목탑이 파괴됐다. 몽골군은 4년에 걸쳐 약탈 살해 등을 자행했으며, 많은 민중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 3차 침입은 1238년에 몽골이 고종에게 친조를 촉구하며 물러갔다.
입조(入朝)와 강화도로부터의 출륙(出陸)을 들어주는 듯이 화의를 하여 철군하게 하였으나 끝내 이를 실행하지 않고 28년간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고래로 중국 역대강대국과 외교상 부득이 사대주의를 취하여 온 것은 사실이나 국왕이 친조(親朝)한 예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친조(親朝)의 예를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겠다”고 통보하였다.
이에 때맞추어 고구려의 남진(南進)에 시달려 온 백제와 신라는, 번갈아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토벌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위협이나 주변정세에도 고구려는 굴하지 않고 입조(入朝) 요구를 묵살, 거부하였다.
친조와 흑조의 접점으로 각종 어족 자원이 풍부하게 집단적으로 서식하는 세계 3대 황금어장의 하나를 형성하고 있다.
2) 영토분쟁역사
⑴ 러·일 통호조약(1855), 러시아와 일본 간 영토 분쟁 조정
- 쿠릴 열도에서는 에토로후와 우루프 섬 사이를 러시아와 일본의 국경으로 하며, 사할린은 국경
본문내용
본 논문은 중국, 대만, 일본 간의 영토 분쟁인 댜오위다오 분쟁을 기준으로 아시아 내 뿐만 아니라 유럽까지 아우르는, 현재 진행 중인 타 영토 분쟁의 분쟁 당사국 양국 간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였다. 이 논문에서는 댜오위다오 분쟁을 기점으로 러시아 일본의 쿠릴열도 분쟁과 한
Ι. 머리말
한반도,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고대부터 많은 전쟁을 겪었다. 고려의 경우, 당시만 해도 상당히 강력하던 북방민족과 한족의 국가 사이에 껴있었기에 수차례 전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대상은 발해를 멸망시켜 고려와 국경을 접한, 거란(요)과 세계정복전쟁을 벌이던 몽골제국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