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 발표. 경성지회장 사임.
1928년
-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 편찬, 건봉사에서 발행.
- 1월, 별건곤에 수필 ‘천하명기 황진이’ 발표.
- 6월, 별건곤에 논설 ‘전문 지식을 갖추자’ 발표.
1930년
- 1월, 잡지 조선농민에 논설 ‘소작 농민의 각오’ 발표.
- 별건
회고담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어려서부터 글에 대한 관심이 뛰어났으며, 14세에는 최충(崔)의 문헌공도(文憲公徒)로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16세, 18세, 20세에 사마시에 응시하여 세 번 모두 낙방하고 말았으니 「연보」의 기록대로 그것은 자기의 생각과 감흥을 자유롭게 읊조리는 시에만
회고담에 의하면 그는 다분히 결벽적이고, 자폐적인 성격의 소유자라고 전한다. 이같은 성격은 그의 방랑적인 삶과 결부되어 문단활동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결과를 빚었다. 그로 인해 문단의 세속적 흐름에 휩쓸려 다니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시적 세계를 개척해 나갈 수 있었다. 이 시기는 널리
회고담을 듣고 웃어 주실는지.........]
누구나 그러하듯이 조봉암 역시 가정내에서의 일차교육을 통해 자신의 내면세계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엄한 어머니와 자유롭고 평화로운 아버지 사이에서 그의 내면세계는 자유와 평화, 사랑과 연민의 끝없는 확장등을 경험하게 되고, 이를 통해 훗날 그것의 인
대해 회고담 성격으로 서술한 작품들도 많이 등장했는데, 여기서 신경숙, 공지영등 여성작가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비판의식과 더불어 개인의 사소한 사건이나 개인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면서 현대의 산업화에 따른 비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노력하는 작품들이 늘어나고 있다.
회고담은 토끼 사냥에 얽힌 이야기이다. 새끼 토끼를 잡고 어미 토끼는 놓쳤는데, 어미 토끼의 ‘살기차고 공푸에 질린’모성을 확인했던 것이다. 소년은 생물 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해부되었다가 술안주가 될 토끼 새끼를 구하려 했지만, 도덕적 규범 때문에 생물 선생님 집 담을 넘지 못한다. 그러자
회고담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그가 문학에 매달리기 시작한 것은 11세 때라고 한다. 집안이 비교적 유족하여 자유롭게 책을 구입해 볼 수 있었고, 그의 형들이 구입한 문학서적들을 읽으면서 그는 문학의 꿈을 키우게 되었다.
그 후 대구, 서울, 수원 또 서울 등지에서 보통교육을 받았고 사이사이에 신
회고담에서 “순이가 여급질을 해다가먹여주는 밥을 얻어 먹으며 (중략) 여급질은 할망정 순이는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다 ”라고 회고하고 있다. 순이는 바의 여급이었지만 장만영이 사랑한 여자였다. 이후 몇 번의 연애경험을 말하며 그가 사랑한 여인들에게 순이라는 애칭을 사용했다고 술회하고
회고담 가운데 한 대목이다.
"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다. 더욱이 나의 아버지가 나를 기르실 적에 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았으니, 일본문학 따위도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 작가라 경멸하리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
회고담 가운데 한 대목이다.
"나는 그때 소년다운 야심이 만만하던 시절이다. 더욱이 나의 아버지가 나를 기르실 적에 유아독존의 사상을 나의 어린 머리에 깊이 처박았으니, 일본문학 따위도 미리부터 깔보고 들었으며, 빅토르 위고까지도 통속 작가라 경멸하리만치 유아독존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