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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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서언
초기 교부 시대의 신학자 오리게네스(Origenes)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의 대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그늘에 가려져 왔던 인물이었으나, 그가 알렉산드리아와 카에사리아(가이사랴)에서 남긴 신학적 업적과 성서 해석의 방법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빛나는 업적에 필적할 만하다.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역사상 최초로 조직신학적 체계를 확립하였으며, 성서 본문의 내용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해 혁신적인 제안을 하였다. 또한 니케아 공의회(325년) 소아시아 비티니아주(州) 니케아에서 동서 교회가 함께 모여 개최한 세계교회회의로 전후 2차에 걸쳐 열렸다.
① 제1차 공의회:325년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소집하였다. 회의의 동기는 아리우스 논쟁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派)를 이단(異端)으로 단죄하여 분열된 교회를 통일시키고, 로마제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참석자는 318명이라고 하나 분명치 않다. 공의회에서는 2편의 신경(信經)이 제출되었는데,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의 에우세비우스가 제출한 것은 폐기되고, 팔레스티나 공동체의 ‘세례신경’을 기초로 ‘동질(同質)’이라는 용어를 보완한 카에사리아의 에우세비우스신경이 채택되어 이것을 기준으로 하여 ‘니케아신경’이 공포되었다. 그 결과 4명의 아리우스파가 파문(破門), 유형당했다. 이 밖에도 부활제의 시기, 이단자에 대한 세례, 서품(敍品)의 장애, 속죄 및 사제제도 등을 제정, 결의하였다.
② 제2차 공의회:787년 니케아에서 열린 제7차 공의회. 당시 섭정(攝政)이던 동로마제국의 황후 이레네 2세가 총대주교 타라시우스를 책동하여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성화상(聖畵像) 숭배, 남녀공주수도원(男女共住修道院)의 금지 등에 관한 조규(條規) 20개 조가 의결되었다. 그러나 성화상에 관한 교리는 서유럽에서 오해를 불러일으켜 얼마 동안 그 승인이 보류되었다.
이전의 초기 교부 신학을 정립하고 토착문화와 기독교의 상호 관계를 모색하였다. 이러한 오리게네스의 신학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학적 사고의 테마를 제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초지일관으로 금욕주의적인 신앙의 자세를 지킨 오리게네스의 생활은 초기 수도원운동의 태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리게네스의 생애와 신학을 고찰함으로써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갈 필요가 있다.
오리게네스의 생애
오리게네스는 185년경 이집트의 항구 도시이자 지중해 동부 연안의 학문적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로마황제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의 박해로 인해 아버지 레오니데스(Leonides)가 순교(210년)를 당하는 등 출발이 순탄치 못하였다. 오리게네스는 모든 점에서 탁월한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아들로서,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진 형으로서 믿음직한 사람이었으며 신앙에서는 모범적이었고, 학자로서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의 제자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범함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비범함 청년 오리게네스를 알렉산드리아의 한 귀부인이 재정적으로 후원하면서 그의 명성은 알렉산드리아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되었다.
203년에 이르러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데메트리우스(Demetrius)에 의해 불과 18세의 나이로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학교를 떠난 클레멘트의 뒤를 이어 세례자 예비학교(Catechetical Shcool)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오리게네스는 여기서 신 플라톤 철학(N대-Platonism)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로마 황제 세베루스의 박해가 끝난 뒤(211년) 오리게네스는 보다 자유로운 몸으로 로마를 방문하면서 기독교 변증가로서 신학적 명성을 쌓아나갔다.(215년)
230년경 오리게네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발생한 미미한 정치적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기서 카에사리아(가이사랴)의 감독이었던 데오크티투스의 부탁을 받고 성서 주석 강의를 하였다. 성직 안수를 받지 않고 성서 주석 강의를 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카에사리아 감독은 오리게네스에게 성직 안수를 베풀었는데(232년),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데메트리우스의 눈 밖에 나 파문을 당하게 된다. 성직 안수에 대한 감독권은 소속 지역의 주교에 권한에 속하였기 때문에 데메트리우스는 격분하였던 것이다. 데메트리우스는 오리게네스가 여행 중 받은 안수를 실격 처리하였을 뿐 아니라, 오리게네스가 과도한 금욕주의를 통해 이단적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는 혐의를 씌어 교회의 극형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문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마태복음 19장 12절 말씀에 따라 이성(異性)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의 고환을 제거하고 늘 맨 바닥에서 잠을 자는 등 고행주의를 엄격히 고수하고 있었다. 오리게네스와 데메트리우스 주교의 갈등은 결국 오리게네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카에사리아 지역으로 이주하여 자신의 신학 교육기관을 세우는 것으로 매듭지어졌다.(234년) 카에사리아을 중심으로 그는 활발한 대외 활동을 전개하였고 245년 그리스 아테네를 방문하고, 플라톤 철학자 켈수스가 기독교 신앙을 비판한 글에 대해 반박한 유명한 저서 「켈수스에 반대하며(Contra Celsum)」을 저술한다.(249년)
신학자이자 고행자였던 오리게네스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순교를 함으로써 그의 파란만장 하였던 생애를 마감하였다. 250년경, 오리게네스는 로마황제 데키우스(Decius)의 박해 기간(249-251년)중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254년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이다.
오리게네스의 신학사상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게네스를 거론함에 있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오리게네스보다 한 세대 앞서 활동하였던 순교자 유스티누스(Justine the Martyr)이다. 유스티누스가 코린토스에서 유대인 트리포(Trypho)를 만나 나눈 대화록에서 우리는 2세기 전반기의 초대 교회 교부들이 어떠한 논리적 체계를 가지고 기독교를 변증하였는지 알 수 있다. 유스티누스는 ‘그리스 철학이야말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 그리스 철학의 논리가 사용될 수 있음을 역설하였다. 심지어 그는 플라톤의 철학 체계를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시작된 기독교 신앙운동을 당대 문화 철학적 주류였던 플라톤 철학과 접목시킴으로써 시대정신과 배치되지 않는 기독교의 모습을 로마 제국에 천명하였던 것이다. 사실 갈릴리 출신의 시골 청년 예수에 의해 미미한 종교운동으로 출발했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그 종교적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 택할 수밖에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순교자 유스티누스보다 더욱 치밀하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였다. 오리게네스는 유스티누스의 그리스 철학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북아프리카의 비(非)기독교적 문화와 전통, 다른 말로 하면 ‘이방적 문화’가 기독교의 본질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것이다. 유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철학을 통해 기독교와 시대정신의 합일점을 모색했다면, 오리게네스는 구약성서의 구절들, 특히 유대 사람들이 이집트인들의 금은 패물로 여호와의 성막을 만든 것을 예로 들면서(출애굽기 11:2, 12:35) 출 11: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출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개역개정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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