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의 인식 일제해방기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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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역사의 인식
-일제해방기의 역사인식-
1. 식민사학
일제의 식민사학은 에도시대 국학파들이 수립한 이른바 황국사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사기].[일본서기] 등 일본 고대의 역사서에 토대를 둔 황국사관에 의하면, 고대 한국의 신이나 왕은 일본의 신이나 와의 후손이라거나 고대 한국은 일본에 의해 정복 또는 지배를 당했다는 식으로 왜곡되었다. 일본 국학파들에 의해 왜곡된 한국사 인식은 19세기말 일본의근대적 역사학풍인 관학아카데미즘에도 계속되었다. 일제관학자들은 서양의 근대적인 이론과 방법을 원용하면서 한국사를 인식했지만, 그것은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우월의식에 기초한 왜곡된 한국사상을 근대적이고 실증적인 방법론으로 강화하는 방향이 되었다.
1910년을 전후한 시점에서는 일본인에 의한 한국사 연구가 개설적이고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1920년대에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적 후원 하에 관변학자들을 중심으로 관변단체 혹은 학회가 결성되어 방대한 자료수집과 함께 체계적이고 집단적인 한국사 연구와 저술 작업이 수행되었다. 일제관학자들에 의해 구축된 식민사학은 일제의 한국강점과 식민통치를 합리화하는 이론적 바탕이 되었다.
식민사학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의 네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일한 민족이라고 간주하는 일선동조론이다. 일본의 고대 문헌에 기초하여 신화시대에는 일본의 신이나 자손이 한국의 신이 되었다고 하며, 역사시대에는 일본인이 한국을 지배하고 정복했다는 등이 임나일본부설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설 등을 주장했다. 이는 두 나라의 조상이 같을 뿐만아니라 고대부터 조선은 일본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근대 이후 일본의 조선 침략은 당연하다는 역사해석이다. 한국인에 대한 우월의식 및 멸시의식이 근저에 깔려 있는 일선동조론은 ‘동화주의’, ‘내선융화’, ‘내선일체’ 등 일제의 지배이데올로기의 논거가 되었으며, 식민사학의 밑바탕이 되었다.
둘째, 한민족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타율성론(他律性論)이다. 한국사를 피침과 피지배의 역사로 점철되었다고 왜곡함으로써 한민족이 자주적으로 역사를 발전시킬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하야시는 1892년 우리나라에 대한 본격적인 통사인 [조선사]에서 조선사는 고대부터 북부는 중국의 식민지로, 남부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본부설로 출발한 것처럼 서술하여 우리나라는 당초부터 식민지로 출발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타율성론은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는데, 일선동조론을 부정하고 한국과 만주를 일체로 보면서 한국사를 만주사의 부용적 위치로 격하시키는 만선사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강조하여 타율성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반도적 성격론, 고대 한국에 미친 중국문화의 영향과 한사군의 존재, 조선왕조의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 등을 강조하면서 한민족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사대주의론 등이 있다 이 타율성론은 결국 한국의 자주적 근대화의 불가능성을 주장하고 근대문명사회로의 발전을 위해서는 일본의 지도가 필연적이라는 논리가 되어 식민지배의 필요성을 강변하는 이론이다.
셋째, 타율성론이 주로 정치적 측면에서 주장되었다면, 사회경제적 측면에서는 정체성론이 주장되었다. 서양 경제사학의 발전단계설을 원용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면서 한국사에는 고대 노예제사회라든가 중세 봉건제사회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경제학자 후꾸다에 의해서 나타났는데, 그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한국은 토지사유제가 발전하지 않아 토지공유의 단계에 머물러 있으며, 교통경제,화폐경제의 발달이 낮은 수준이고, 씨족적 통제의 사회로서 상공업의 사회적 분화가 미숙하다고 주장하였다. 결국은 한국사는 세계사의 보편적인 발전과정을 겪지 못하고 정체되었다는 이론이다. 경제사적 관점에서의 정체성론은 일제의 침략 논리인 일본에 의한 자본주의적 근대화론을 합리화하는 성격을 띠고 있다.
넷째, 조선시대 정치사를 대상으로 형성된 당파성론이다. 조성왕조의 정치를 당쟁이라고 규정하고 매도하기 시작한 것은 시데하라의 [한국정쟁지]라는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는 당쟁이라는 용어를 나름대로 개념 규정하여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조선시대의 정파는 ‘주의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는 공당이 아니라, 애해를 가지고 서로 배제하는 사쟁이다’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당파성론은 조선시대 정치사를 당파간의 계속적인 정정으로 점철되었다고 보고, 이것이 국민의 체질적 특성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당파성론은 한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분할통치 정책을 뒷받침하는 이론이었다.
이러한 논리로 전개된 식민사학은 [동국사략]이나 [동사집략이라는 책에서 일본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받아들이는 등의 한국의 역사학에 깊이 침투하여 한국의 역사 정신을 오염시키고 제죽주의자들의 침략에 논리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시키기도 하며, 일본인에게는 조선에 대한 멸시감을 불러일으켰고, 식민지 조선에서는 자라나는 우리 어린이들에게 식민사관을 주입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사학과 그 뒤에 이어 신민족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