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서동만) 1-2장 - 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초기의 산업관리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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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서동만) 1-2장 - 인민위원회,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초기의 산업관리체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서동만) 1-2장
서동만 박사의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는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가 1961년 제4차 당대회를 전후해 확립됐다는 인식 아래 해방 이후부터 이 시기까지를 5개의 단계로 나누어 분석한다. 북조선의 사회주의 체제 성립 과정에 역사적 접근, 그리고 당=국가체제가 구성되기까지 정치적 세력관계의 변화과정을 기본 축으로 접근했다. 여기에 당과 정부의 관계, 당과 군대의 관계, 공업부무의 관리체제, 농업부문의 농업생산체제 및 농촌지역의 통치체제 등 부문별 분석이 돋보인다. 사회주의체제에서 군대는 통치체제의 핵심이며 특히 소련의 군사적 점령과 중국 국공내전의 직접적 영향 아래 정권이 수립된 북조선의 경우 군대가 체제형성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서명한다.
1.해방과 인민위원회(1945~1946)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북조선분국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 이후 미소 양군이 진주하기 전 권력의 공백상태를 메운 것은 각 지역의 자치조직이었다. 중간좌우익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체로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는 좌익의 주도로 조선인민공화국으로 개편된다.
조선의 전통적인 정치 중심지는 서울이었지만 분할점령이라는 현실 아래 평양은 행정중심지로 분리된다. 이후 북조선의 정치과정은 평양이 새로운 정치적 중심으로 자리잡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소련은 일정한 시기까지 미소 협조를 유지하면서 북조선 점령 초기 소련에 우호적인 북조선만의 정권적 조직의 형성을 지시했다. 이는 북조선점령에 따른 소련군최고사령부의 7개 항목 지시를 통해 확인된다. 이를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는 공산당이 통일전선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소련의 정책을 배경으로 공산당의 남북분립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은 중국 공산당 아래에서 조선공작단을 만들어 귀국한 김일성 등 빨치산 그룹이다. 이들은 9월 19일 소련군과 함께 원산에 상륙하기에 앞서 북조선 각지에 설치된 소련군위수사령부의 부사령 직함을 가지고 해당 지역에 부임하도록 명령받고 있었다. 김일성은 귀국 전 소련군이 대일작전을 앞둔 시점에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의 비서 즈다노프와 면담하기도 했다. 이는 소련이 정책적 의지를 갖고 남북분립을 주도했으며 김일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음을 방증한다. 지난주 강독했던 찰스 암스트롱의 북조선 탄생에서 그가 "김일성이 소련군과 함께 상륙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주장한 것을 정면으로 반박한 셈이다.
1945년 10월 13일 공산당북조선분국이 창립됐다. 이는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남과 북으로 분립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 대회에서 채택된 "정치노선 확립 조직확대 강화에 과한 결정서"는 조선해방의 두개의 특수성(외래의 힘에 의한 해방, 사회주의국가와 자본주의 국가의 힘에 의한 해방)을 지적하면서 조선자본민주주의혁명의 기본과업은 토지문제라고 규정했다.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드러내지 않았고 김일성이 분국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지도 않았다. 아직까지 공산당의 위상이 확실치 않았고 김일성 지지세력의 역량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운동 지도자보다는 민족의 지도자, 전 인민의 지도자로 선전됐다.
10월 19일 북조선만의 행정기구로 북조선 행정10국이 조직된다. 11월 20일에는 서울의 공산당중앙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도 스스로 간판을 내리고 관할 범위도 38선 이남으로 한정했다.
12월 초 소련에서 당, 행정 전문가인 조선인 그룹이 추가로 도착했다. 허가이 등 소련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같은달 13일에는 김두봉 무정 최창익 등 연안 조선독립동맹의 주요멤버가 귀국해 연안계를 형성했다. 이들은 기존의 국내계에 대항해 김일성의 강력한 후원세력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