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원 작가와 구보씨의 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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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태원 작가와 구보씨의 일일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그는 1909년 서울의 다동, 당시의 통칭으로는 수중박골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박용관, 모친은 남양 홍씨로 4남2녀 가운데 차남이었다. 부친은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그의 숙부는 의사였다. 그의 집안은 중인 계층이었으며, 개화된 집안이었다.
일곱 살 때부터 큰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으며 1919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신교육을 받기 시작한다. 1923년에는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는데, 서구의 명작들을 열심히 읽으며 문학에 일찍이 뜻을 두었다. 1926년에는 시 「누님」이 『조선문단』에 당선되기도 했다. 문학에 탐닉하던 박태원은 지적인 자만심과 우월감에 빠져,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회의에 빠졌다. 그래서 박태원은 고독하고 우울해졌고 신경쇠약이 되어 결국 휴학까지 하게 된다.
1928년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후, 복학하여 제일고보를 졸업했다. 이후 여러 필명으로 소설과 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곧 일본으로 간다. 1929년 일본에 건너가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하지만 문학에 빠져 있었던 그는 중퇴하고 만다. 그때 그는 학교보다는 영화관이나 술집에 가길 즐겼다. 영화와 미술, 음악 등 예술 전반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이며 현대적인 예술 감각을 익혔다. 호세이 대학을 중퇴하고 얼마 뒤 귀국하는데, 언제 귀국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일본에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의 초기 작품은 지식인의 현실 생활에서 오는 우울을 표현한 것이었으나, 실상 그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쏟은 부분은 표현 기교였다. 간결체를 실험하거나 문장을 최대한 길게 늘이기도 했으며, 또 숫자와 기호까지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실험적인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한 예로 「딱한 사람들」과 같은 작품에서는 신문 광고를 직접 인용해서 보여주기도 했다.
구인회의 일원으로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펼침
박태원이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던 때는 1933년 구인회에 가담하면서부터였다. 그가 자신의 예술파적인 기질, 모더니스트로서의 성향을 마음껏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구인회를 통해서이다. 구인회에서 그는 이태준과 급격히 가까워져서, 이태준이 『문장』을 발행하기 시작할 때 문장사에서 그의 단편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출판해주기도 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모더니즘을 실천하면서 「피로」(1933)「딱한 사람들」(1934)「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 등의 작품을 썼는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발표하면서 모더니스트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게 된다. 이태준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구보는 누구보다도 선각한 스타일리스트다. 그의 독특한 끈기 있는 치렁치렁한 장거리 문장, 심리고 사건이고 한 번 이 문장에 걸리기만 하면 일사(一絲)를 가리지 못하고 적나라하게 노출된다.
박태원과 이상
이상과 박태원은 둘 다 구인회의 구성원이기도 했지만 워낙 절친한 친구였으며 1930년대 종로 큰 길거리의 한 명물이었다.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할 때 이상은 하웅이라는 필명으로 그림을 그려주기도 했으며,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속에서 구보와 함께 밤거리를 산책하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상이기도 하다. 한편 박태원은 단편소설 「애욕」에서 이상의 연애를 자신의 고현학의 대상으로 삼아 묘사하고 있다. 사실 박태원에게는 이상만큼 흥미롭고 훌륭한 관찰 대상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단편 「이상의 비련」에서는 자신이 「애욕」에서 이상의 연애를 다루었던 사실을 다시금 언급함으로써 이상에 대한 관심과 우정을 재삼 확인했다.
친일과 월북
1930년대 후반에는 『천변풍경』(1936)을 비롯해서 도시 주변부의 삶의 양태를 그린 작품을 썼지만 그도 점차 대다수의 문인들처럼 강화되어가는 군국주의 체제 속에서 친일 행위를 하게 된다. 조선문인보국회로 발전하는 조선문인협회에 가입했으며 일제의 강제 징용과 선전에 동조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이태준이 중심이 된 좌익단체 조선문학가동맹에 참가했고, 6·25 전쟁 중에 월북했다. 월북 후에는 주로 역사소설 집필에 주력해서 『계명산천은 밝아오느냐』를 간행했다. 1965년 이후 건강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어 실명과 전신불수의 역경 속에서도 동학농민전쟁을 소재로 한 장편 『갑오농민전쟁』(1977~1986)을 집필했다. 이 필생의 역작으로 박태원은 북한에서 최고의 소설가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리고 북한의 『조선문학』 1986년 7월호에는 이 해 7월 10일 오후 그가 사망했다는 글이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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