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의 이승만과 미국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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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의 이승만과 미국3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승만 대통령과 미국은 대결과 반목의 관계였다. 이는 한국전쟁 말기에 들어 극대화된다. 바로 반공포로석방이 그 예이다. 이는 이승만이 품고 있던 강자에 대한 약자의 울분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2. 이승만과 미국의 초기 관계
이승만이 처음 미국문명과 접촉하게 된 것은 1895년 배재학당에 입학하고 부터이다. 그는 영어를 배울 목적이었지만 서재필의 강의를 통해 ‘정치적 자유’의 개념을 알게 되었고 협성회, 독립협회에서 간부로 일하다가 한성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다. 석방된 후, 미국으로 건너가 루즈벨트를 만나기도 했고 현지 대학을 수학하고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렇게 친미적인 이승만이었지만 1924년에 ‘가쓰라-태프트 협약’의 내용이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게 된다. 당시 미국은 러시아의 아시아진출을 우려하고 있었고 일본은 유일하게 러시아에 대항할 수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미국이 일본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3. 미국의 임시정부 승인 거부
미국과 일본의 전쟁 직후, 이승만과 미국은 극심한 대결구도로 가게 되는데 그 시작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 문제였다. 이승만의 일본의 패배를 예상하였고 한국이 독립을 해야 하므로 미국이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국은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을 우려하여 승인을 거절했다. 이후 이승만은 끈질기게 승인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거절을 했고 특히나 루즈벨트는 망명정권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인이 보기에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고 독립운동가들끼리 대립을 계속하고 있다고 평가하였다.
4. 미국의 신탁통치정책
루즈벨트는 1943년 3월에 신탁통치안을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하였다. 이에 이승만은 격분하여 항의문을 보냈다. 한국 사람들은 독립을 원하고 소련이 소비에트 조선공화국을 설립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 그 전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5. 이승만과 미국과 소련
이처럼 이승만은 소련의 한국점령을 매우 염려하고 있었고 나아가 미국이 한반도를 소련에 넘겨줄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게 되었다. 사실 당시 미국은 소련이 일본 패배 이후 한반도를 장악하는 것을 불가피한 일로 보고 있었다. 특히나 중국정부가 미국에 제공한 소련이 두 개의 조선‘사단’ 을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통해 더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정부가 임시정부의 승인을 다시 요청했을 때 미국은 중국이 승인을 한다면 소련이 중국을 막으려고 할 수 있고 그러면 문제가 더 복잡해지기 때문에 승인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한반도 문제로 소련을 자극하기 보다는 중소미 3국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였다. 미국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련과 협력하여 일본을 패배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6. 이승만의 ‘공산세력’과의 합작 거부
미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 거부의 주된 이유로 한국인들이 단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승만에게 단합하라고 한 상대가 한길수였다. 이승만의 입장에서 한길수는 공산분자였다. 좌익세력과 연관을 맺고 있는 인물은 모두 공산분자라고 생각했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과 한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①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주체성이 없는 소련의 도구이고 ②공산당의 목적은 정권을 장악하거나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고 정권을 장악할 때까지 선동을 계속 할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협조관계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공산당과 단합하려면 공산당을 만족시켜야 하고 공산당은 정권을 장악하기 전까지는 만족을 하지 못하니 결과적으로 공산당에 항복하기 전에는 미국을 만족시킬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7. 미국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
1945년 유엔창립기념총회에서 이승만은 사적 기관의 대표자로 방청을 했다. 소련 측의 정보를 얻기 위해 고용한 구베로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가 한반도를 소련에게 넘겨주었다는 정보를 가져왔다. 이에 이승만은 진위를 가릴 겨를도 없이 트루먼에게 항의전보를 보냈고 대대적인 선전을 하였다. 하지만 결국 이는 거짓이었고 얄타회담에서 한국에 관해 합의한 바는 하나도 없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행동은 자신과 임시정부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유엔총회에 왔던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이승만의 전단을 받고는 노여움을 표했으며 그 이후 소련은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적대적인 단체로 규정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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