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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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후감]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본문요약
- 윤치호가 본 지역감정
- 평안도는 근대화의 선진 지역
- 기독교계 지식인의 '남북감정'
- 평안도, 보수화되다
 
2.참고자료
3.맺음말

본문내용
윤치호는 옛 동지인 안창호가 그러한 망언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의 망언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그러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의 심각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주변 인물인 신흥우와 유억겸에 대한 우려는 대단했다. 배재학당 교장을 지낸 신흥우는 당시 YMCA의 총무로서 이승만계의 국내 실세로 활동하고 있었고, 유억겸은 '개화의 선각자'로 일컬어지는 유길준의 아들로서 당시 연희전문의 교수이자 기독교계의 중진이었다. 두 사람 다 서울지역 기독교계 및 지성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윤치호는 이 두사람의 '대부'나 다름이 없었다.
  세번째는 1932년 7월15일의 일기이다.

 안창호가 오늘 오후에 수감되었다. 나는 이광수의 간청을 받아들여 안창호와 간단한 면담을 가졌다. 그런데 내가 총독부측에 안창호의 석방을 청탁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에 김활란이 화가 난 모양이다. 안창호와 이광수에 대한 나의 진솔한 우정때문에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이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국내로 이송되어 검찰과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때 그의 수제자인 이광수는 스승의 건강을 염려하여 총독부 고위층과 가까운 윤치호를 통해 선처를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 이른바 기호파들은 윤치호의 '이적행위' 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35년 3월 24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윤치호는 옛 동지인 안창호가 그러한 망언을 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의 망언이 사실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그러한 유언비어가 유포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의 심각성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자신의 주변 인물인 신흥우와 유억겸에 대한 우려는 대단했다. 배재학당 교장을 지낸 신흥우는 당시 YMCA의 총무로서 이승만계의 국내 실세로 활동하고 있었고, 유억겸은 '개화의 선각자'로 일컬어지는 유길준의 아들로서 당시 연희전문의 교수이자 기독교계의 중진이었다. 두 사람 다 서울지역 기독교계 및 지성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윤치호는 이 두사람의 '대부'나 다름이 없었다.
  세번째는 1932년 7월15일의 일기이다.

 안창호가 오늘 오후에 수감되었다. 나는 이광수의 간청을 받아들여 안창호와 간단한 면담을 가졌다. 그런데 내가 총독부측에 안창호의 석방을 청탁하느라 바쁘다는 소식에 김활란이 화가 난 모양이다. 안창호와 이광수에 대한 나의 진솔한 우정때문에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이 화가 난 것이 틀림없다.

  안창호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상하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으며, 국내로 이송되어 검찰과 경찰의 심문을 받고 있었다. 이때 그의 수제자인 이광수는 스승의 건강을 염려하여 총독부 고위층과 가까운 윤치호를 통해 선처를 호소하였다. 이에 대해 신흥우, 유억겸, 김활란 등 이른바 기호파들은 윤치호의 '이적행위' 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마지막으로 1935년 3월 24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후에 중앙호텔에 머물고 있는 안창호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이 반남(反南)지역 지도자라는 세간의 비난을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이성만이 지역감정을 조장하고 있으며, 한국의 지역감정을 부추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윤치호는 안창호가 가석방으로 출옥한 수 그를 방문하겨 지역감정을 화제로 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안창호의 발언내용이 당시 지역감정의 심각성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요컨데 『윤치호 일기』에 의하면 일제시기 기독교계 지식인들의 지역갈등 구도는 서북지방과 기호지방을 중심으로하여 나타났으며,그 정점에 안창호와 이승만이라는 당대 최고의 두 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김문조(1990),「한국지역주의의 형성과 성격」,『한국의 지역주의와 지역갈등』, 성원사.
김문조(1993),「지역주의의 형성과정과 특성」,『오늘의 한국사회』, 사회비평사.
김상태(1998),「지역감정은 언제부터」,『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2, 역사 비평사.
김종철(1991),「지역감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지역감정연구』, 학민사.
홍기훈(1996),『지역주의와 한국정치』, 백산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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