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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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따뜻한 사색의 시인
목월(木月) 박영종(朴泳鍾)
Ⅰ. 그는 누구인가?
경북 고성에서 1916년에 태어난 그는 경북 경주 월성군 서면 건천리의 모량이란 마을에서 부친 박준필씨의 4남매 중 맏이로 자라났다. 본명은 영종, 소국이라는 아호로 불리기도 했다. 부친은 경주 수리조합 이사로 근무하고 있었고, 모친은 열렬한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자녀들을 보살폈다.
목월의 시에 지속적으로 작용했던 자연에 대한 탐구는 집근처의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자라면서 받은 영향으로 생각된다. 목월은 1933년 미션스쿨인 대구 계성중 재학당시 17세의 나이로 동시 「통딱딱 통딱딱」을 《어린이》잡지에, 「제비맞이」를 《신가정》지에 본명으로 발표함으로써 동요작가로 데뷔했다.
1935년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주금융조합에 취직해 있다가 1938년 공주 출신의 유익순과 범상치 않은 인연으로 결혼했다. 금융조합에 재직중인 1939년 《문장》지 9월호에 「길처럼」,「그것은 年輪이다」가 , 12월호에 「산그늘」이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장했다. 그 후 1940년에 이르러 《문장》지 9월호에 「가을어스름」과 「연륜」이 3회 추천 완료됨으로써 문단에 정식 데뷔했다. 경주 시절 동무였던 김동리의 존재는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며, 동리와 목월의 작품에는 유년시절을 보낸 경주의 향기가 배어있다.
해방이 되면서 목월의 시작활동은 본격화되어 1946년에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집」을 간행했다. 이 무렵 동시의 창작에도 힘을 기울였다 한다. 1951년 대구에서 창설된 종군작가단의 일원이 되어 이한직, 조지훈, 오영진 등과 함께 중부전선을 종군하며 서울탈환과 평양입성 등을 함께 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였다. 625전쟁 후인 1955년 12월에는 첫 개인시집 『산도화』를 간행했고 이후 수상집『구름의 抒情』, 『토요일의 밤하늘』, 그리고 자작시 해설집인 『보랏빛 소묘』등을 펴내기도 했다. 1956년 동생 영호의 죽음을 겪은 후 그의 시세계에는 변모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1959년 『난기타』를 펴냈으며 수상집 『여인의 書』를 냈다. 널리 알려진 시 ‘하관’은 『난기타』에 있는 것으로, 동생이 죽은지 1년쯤 뒤에 썼다.
1962년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양대 국문과교수와 동대학 학장을 역임하면서 1968년에 시집 『경상도 가랑잎』을, 연작시집 『어머니』를 간행하였으며 수필집 『밤에 쓴 人生論』,『구름에 달가듯이』를 펴냈고, 이 무렵 다시 3인 공동시집『청록집 以後』『청록집 기타』를 펴내기도 하였다.
특히 목월은 1960년부터 《현대문학》지 시 추천 위원으로 또한 《심상》시 추천위원으로 각종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수많은 후배와 시인들을 배출했다. 정지용이 청록파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을 문단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목월 역시 수많은 시인들을 배출했다. 허영자, 이숭훈, 김종해, 유안진, , 이건청, 오세영, 신달자, 김명배, 한기팔 등이 있다.
문단활동으로는 1946년 서정주, 김동리 등과 함께
참고문헌
참고문헌
이상규, ‘ 문학 작품에 나타난 방언’ , 새국어생활. 제13권 제4호 (2003. 겨울), p.45-66
이형기, 『자하산청노루』’- 박목월 시전집, 세계문학사 1986
오세영, 『한국현대시인연구』, ‘영원탐구의 시학-박목월론’, 월인 2003 p349~354
이승훈, 『한국현대시론사』 , 고려원 1993 p168~172
이탄, 『한국의 대표시인론』, ‘박목월론’ . 문학아카데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