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생애와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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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황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이황
이황(李滉, 1501~1570)은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고려말 유입된 성리학의 토착화에 한 획을 긋는 인물이며, 당대 사회 주도층으로 성장하고 있던 사림세력의 활동에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인물이다. 또 그는 조선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이기호발설이 사상의 핵심이며, 교육기관인 도산서원을 설립하고 후진양성과 학문연구에 힘쓰신 분이다. 이러한 역사상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이황의 생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퇴계이황의 생애와 업적
퇴계는 연산군 7년 11월 25일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현 노송정 종택 태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진사 이식이었고 어머니는 의성김씨와 춘천박씨 두 분이신데 재취로 들어오신 박씨의 소생 다섯 형제중에서 퇴계 선생은 그 막내였다. 퇴계는 태어나서 33세까지 유교경전의 연구 수학을 거치는데 그의 부친은 서당을 지어 교육을 해보려했지만 그 뜻을 펴지 못하신 채 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만에 40세의 나이로 돌아가시니, 그는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야 했다. 부친이 돌아가시던 당시 맏형 한 분만 혼인하였을 뿐 다른 형제는 모두 어렸기에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 홀로 농사와 누애치기로 이어가는 어려운 형편이었으나, 어머니는 전처의 소생 자녀들까지 차별하지 않고 모두 길렀다고 한다. 퇴계는 바로 이러한 어머니의 성품를 일컬어 "나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분은 어머니시다" 라고 하였을만큼 그의 어머니는 과부의 자식이기에 몇 백배 더 조신해야 한다는 뜻에서, 퇴계를 비롯한 자녀들에게 아주 엄하게 가르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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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 후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으로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생활을 보내면서 끊임없이 학문연마에 정진하여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게 되나, 43세 때 퇴계는 이 후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었고,50세 이후로 계속 임명과 사퇴를 반복하면서 고향에서 학문연구와 강의, 저술에 전념하는 강학기를 거치는데 퇴계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그리고 우리에게 유명한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존경함에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퇴계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하여 사직상소를 올려 관직을 받지 않았으며, 어쩔 수 없을 시에는 마지못해 잠시 동안 나갔다가는 곧 사퇴를 하곤 하니 그로인해 귀향하기를 반복하기도 하였다. 성현의 품격은 생을 마치는 죽음의 자리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는 격언 그대로 퇴계는 70세 되던 1570년 12월 8일에 생을 마치는데, 그는 운명하기 닷 세 전에 자제들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빌려온 서적들을 돌려보내게 하였으며, 그 다음날에는 조카를 불러 유서를 받아쓰게 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죽거든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 첫째는 조정에서 내려주는 예장을 사양할 것이며 둘째는 비석을 세우지 말고 조그마한 돌 전면에, 라고만 새기고,
그 후면에는 간단하게 고향과 조상의 내령 뜻함과 행적만을 쓰도록 하여라.」
퇴계는 이렇게 유서를 남기고 12월 5일, 시신을 염습할 준비를 하도록 하고 12월 7일에는 제자 이덕흥에게 자신의 서적을 맡도록 하고 그 이튿날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퇴계이황의 사상
1. 이기론
퇴계의 사상은 정자, 주자의 입장을 바탕에 둔 정주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졌다. 그리하여 정주 계통의 성리학설을 기본 입장으로 하여 퇴계는 이와 다른 이론이나 학설을 배척한다. 불교나 도교와 같은 다른 사상은 말할 것도 없고, 같은 성리학이라 하더라도 심학이라 불려지는 양명학이라든지, 서화담 계통의 기일원론, 나정암(나순흠이라고도 함, 명의 성리학자)의 주기설 및 오초려(오징이라고도 함, 원의 학자)의 주륙 절충적 견해 등을 배척한다. 그 중에서도 양명학과 화담계의 기일원론에 대한 배척이 가장 강력하다. 퇴계는 양명학의 심즉리설과 지행합일설을 거경궁리론과 지행병진설로 조목조목 반박하고, 화담의 기일원론을 이기이원론으로 반박한다. 결국 퇴계는 정주의 이기이원론만을 인정한다.
2. 심성론(인성론)
이처럼 퇴계는 정주의 입장을 자신의 학문적 토대로 하여 출발하였지만 깊이를 더하여 감에 따라 독자성을 띠게 되었고, 마침내 정주의 차원을 넘어서게 되었는데 그 좋은 예가 심성론 특히 사단칠정론이다. 퇴계는 기대승과의 4단7정론을 통하여 이기론의 이론을 심성 개념의 분석과 해명에 적용하여 한국 유학의 중요한 특징인 심성론(인성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와 같은 퇴계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은 강한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하게 된다.
3.수양론
퇴계의 학문정신은 이론적 정밀성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 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인간의 심성을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해한다는데 중요한 특징이 있다. 퇴계의 수양론은 심(心)과 경(敬)의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바탕이요, 경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으므로 이 경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며, 퇴계가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의 태도를 한 평생 몸소 실천한 인격자이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에 대한 일화
퇴계가 태어난지 일곱달 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박씨부인은 농사와 길쌈으로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가시며 여러 자녀들를 학문에 정진하게 하였고 기회 있을 때마다 여려 자식들을 앞에다 불러놓고 "너희들은 아버지가 계시지 아니하므로 다른 아이들과 달라서 공부만 잘 해서는 안된다. 학문도 남들 보다 더 잘 해야 함은 말 할 것도 없으며, 더욱이 행실에 있어서 각별히 삼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만약 행실이 방정하지 못하면 과부의 자식인 까닭으로 옳바르게 가르치지 못하여 그렇다고 남들이 손가락질할 터인즉 이에 각별히 유념하고 또 명심하여 언행을 바르게 함으로써 훌륭하신 조상님들에게 욕을 돌리지 않도록 하여라 "
박씨부인은 퇴계를 비롯한 여러 자녀들에게 이처럼 수없이 타이르며 교육을 시키셨다고 하는데 바로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도 결코 흘려 듣지 말아야 할 아주 보석같은 말씀이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