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취 영재 사례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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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취 영재 사례 조사하기
현재 살아있지 않은 사람들 중 가장 아이큐가 높다고 밝혀진 이로써 세계에서 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아이큐가 높았던 사람은 William James Sidis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 라는 1898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소련이민자의 아들이다. 아이큐가 너무 높아 정확히측정을 할 수는 없었지만, 250~300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11살 땐, 하버드 대학에서 4차원의 세계에 대한 강의를 했을 정도다.그러나 그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않았다. 은둔생활을 하다가 1944년 뇌출혈로 사망했다.
William James Sidis는 천재소년으로서 18 개월째 책을 읽었고, 8세가 되기 전 4개의저서를 냈고 8개의 외국어에 능통 했다고 한다. 게다가 8개의 외국어 중에 하나는 자신이 직접 만들어 낸 언어였다. 11세 때에 저명한 수학자들에게 4차원에 관한 강의를 했고 하버드 대학을 16세에 졸업했으며, 텍사스 주 라이스대학의 수학과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정상적인 시선과 대접을 견디지 못하고 교수직을 그만둔 뒤, 한때 법학대학원을 다니다 중퇴하는 등 방황하다가 21세에는 반전 시위 도중 체포되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곧 출감하기는 했으나, 그는 한참 젊은 시절에 이러한 심리적 변화를 입게 되어, 수학과 대중의 여망을 완전히 저버리게 되었다. 그는 종적을 감추고 사회원으로서 평범한 생활을 했으며, 시내버스 환승권과 인디안 민요 수집에 몰두했다. 뉴요커(New Yoker)잡지가 그를 찾아내어, 그의 근황을 알리고, 그의 내력에 대하여 동정 있는 기사를 실었다. 그것이 그에게 미친 영향은 심대했으며 그 기사는 틀림없이 그의 요절에 일조를 했다. 기사가 나왔을 때, 시디스 ‘The New Yorker’ 를 사생활 침해로 고소했다. 남부 보스턴의 초라한 하숙집의 거실의 넓은 방(홀)에서 그는 그 자신의 소송 사건 적요서를 갈겨썼다. 그는 더 이상 천재가 아니라는 연민을 자아내는 요지, 내용을 제출했다. 그는 보통의 남자가 되었고, 그가 말하길, 이를 증명하기 위해 지능적인 검사를 하겠다. 고소는 법정 밖으로 내던져졌고 시디스는 streetcar 이동을 길을 따라 시내버스 환승권을 줍는 일에 그의 고독한 방황을 계속했다. 그의 삶은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받기 위해 피나는 법정 투쟁을 벌이는 등 고단하고 쓸쓸했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 40여 가지의 언어를 구사하고 우주에서 암흑물질(dark matter)의 존재를 예견하는 등 타고난 천재성은 여전했다. 그는 뇌출혈로 사망할 당시 46세였다.
2. 정경훈 군
너무 빠른 시대에 영재성을 보인 정경훈 군..
영재들은 학교생활에 부적응하는 경우가 많다. 초등학교 입학 후 문제가 드러나거나 이르면 유치원 과정에서부터 또래집단이나 교사와의 관계에서 심각한 부조화로 고통 받는 영재들이 많다. 정경훈군(12)은 분명 불행한 경우에 속했다.
경훈이는 17개월에 숫자의 의미를 알기 시작했고, 두 살 무렵에는 글자가 적힌 그림카드로 혼자서 한글을 읽어내는 원리를 이해하더니 나머지 글자들도 읽기 시작했다. 세 살에는 웬만한 영어를 읽을 수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왜’ ‘어떻게’ ‘뭐야’ 하고 묻는 대신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스스로 단어를 읽혔다.
다섯 살 때 어린이 수학교재에 나오는 수박쌓기 문제를 풀면서 미분 방정식을 푸는 데 쓰이는 가우스 공식을 이용하는 것을 보고 어머니 이길순씨는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우연한 기회에 고(故)정연태 교수(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영재 발굴과 교육 사업을 펼쳤다)를 알게 돼 다섯 살 경훈이와 동생 지훈이를 테스트했다. 그 결과 경훈이는 그야말로 특별히 튀는 영재였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수학능력이 뛰어나 전국 최고 IQ라는 수식어와 수학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정 교수 밑에서 곧장 수학속진에 들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생 수학영재와 비슷한 수준이 됐다.
93년 여섯 살 때 처음 지능검사를 받은 경훈이의 지적 능력은 놀라웠다. 160점 만점에 157점. 이때부터 경훈이에게는 전국 최고의 IQ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97년 한국교육개발원에서 실시한 수학·과학의 영재성 검사 결과 초등학생용에서는 95점(100점 만점, 평균 25점)을 기록했다. 중학생용 테스트에서도 77점을 받았다. 과학적 창의성은 초·중·고교생을 통틀어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와 함께 공간화· 시각화 능력과 직관적 통찰력, 적용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영재아라는 판정을 받았다고 해서 경훈이가 세상으로부터 이해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네 살 때 유치원에 들어간 이후 경훈이의 단체생활은 문제의 연속이었다. 영재아들의 특징 중 하나가 흥미를 느끼는 일에는 엄청나게 집중한다는 것이다. 경훈이도 일단 블록쌓기를 시작하면 자신이 원하는 형태가 만들어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일어날 줄 몰랐다. 그러다 친구들로부터 방해를 받으면 몹시 화를 냈고 그런 경훈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과 싸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또래들을 사귀고 단체생활도 익히라는 뜻에서 보낸 유치원이 오히려 경훈이에게는 고립감만 안겨 주었다.
초등학교에 진학한 뒤로는 더욱 힘들었다. 단체 생활에서 경훈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 사이에서 고립감이 생기고 부적응 문제로 두 번 전학에 결국 시골 학교로 다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일단 또래들과 학습 진도가 맞지를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덧셈 뺄셈, 곱셉, 나눗셈을 배울 때 경훈이는 혼자서 복잡한 방정식을 풀며 수업 중에 딴 짓만 했고 엉뚱한 질문을 하거나 친구들과 싸우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냈다. 교사들도 이런 경훈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경훈이의 지능이 높다고 해서 학교성적이 반드시 우수한 것도 아니었다. 3학년 때는 체육 양, 도덕과 음악은 미를 받았고, 3·4학년 연이어 수를 받은 것은 수학밖에 없었다. 게다가 행동발달 사항에는 ‘사교성과 끈기가 부족하다’든가 ‘질서를 잘 지키고 맡은 일을 잘 하나 가끔 자제력을 잃음’ 등의 지적도 있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싫어하는 아이를 전쟁을 치르듯 보내던 이길순씨는 담임교사로부터 “다른 아이 60명을 지도하는 것보다 경훈이 한 명 가르치는 게 훨씬 힘이 들고 어려워서 못 가르치겠다” 는 말을 듣고 경훈이가 3학년이 되자 서울생활을 포기하고 고향 구례로 내려갔다. 어머니 이길순씨는 ‘보통 엄마의 천재아들 이야기’ 서문에 부모의 괴로운 심정을 이렇게 밝혔다.
“아이가 영재라는 사실에 대한 기쁨은 잠깐, 그보다 훨씬 많은 시름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유치원에서 학교에서 내 아이는 문제아가 됐고, 선생님은 이런 아이는 도저히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치고 싶지도 않다고 노골적으로 말했다.
얼마나 엄마가 극성을 부렸으면 이제 여섯 살 난 꼬마가 영어를 읽고 복잡한 방정식을 풀까 하는 경멸어린 눈초리를 받아본 적도 많다. 처음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우리 아이가 조금 다른 것 같다고. 그러나 그들은 맹목적인 모정으로 가득한 엄마의 과장으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땅에서는 영재로 태어난 것이 형벌이구나 하는 생각에 속이 상해 아이가 보지 않는 곳에서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