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리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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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론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동리론
Ⅰ. 약전
1913년 11월 24일 경상북도 경주시 성건리 출생.
8세 때 향리에 있던 경주 제1교회 부속 계남학교에 입학, 졸업.
1926년 대구 계성중학교에 진학, 2년을 수학하며 서울 경신 고등보통 학교에 3학년으로 전입했다가 4학년에서 중퇴. 귀향하여 박목월 등과 사귀면서 동서의 문학을 4년 간 섭렵.
1933년 다시 상경, 서정주 등과 사귀면서 시를 습작. 극시 ‘연당’을 탈고(미발표). 「가톨릭 청년」에 ‘망월’ 등 몇 편의 시와 수필을 발표.
1934년 1월 조선일보에 시 ‘백로’가 입선됨.
1935년 1월 단편 ‘화랑의 후예’가 중앙일보 신춘현상모집에 당선. 본격적 문학활동을 개시.
해인사에서 ‘산화(山火)를 씀. 이주홍, 허민, 최인욱, 조연현, 김종석, 홍구범 등과 교류.
1936년 1월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산화’가 당선, 문단의 화제를 일으킴. 상경하여, ‘무녀도’, ‘바위’, ‘술’, ‘산제’ 등을 발표.
1937년 다솔사로 내려가 야학교사로 근무, 인기가 대단하여 다솔사 소속 전도관을 빌어 광명학원을 열었음.
1938년 문학의 순수성을 주장한 평론 , 을 발표. 그 후 1940년까지 단편 ‘솔거’, ‘잉여설’, ‘황토기’등을 탈고하고 시 ‘구강산’, ‘행로음’, ‘내 홀로 무어라 중얼거리며 가느뇨’를 발표.
1940년 어용문학 단체인 문인보국회, 국민문학연맹 등의 가입을 거부, 광명학원 강제 폐쇄. 백형 김범부 구속 후 절망과 분노를 안은 채 만주 등지를 방황, 사천에서 해방을 맞이함.
해방 후 곧 상경, 좌우투쟁의 와중 속에서 민족진영에 가담, 순수문학을 옹호하는 대표인물로 활동하면서 곽종원, 서정주, 조연현, 조지훈, 유치환, 김달진, 박목월, 박두진 등과 한국청년문학작가회를 결성하고 그 초대회장에 피선. 48년까지 단편 ‘윤회설’(1946), ‘지연기’(1947), ‘달’(1947), ‘혈거부족(1947)’, ‘역마’(1948) 등을 발표. 좌익 문학인과의 이론투쟁에도 앞장서 1947년 4월 구상이 관련된 시집 「응향」사건이 터지자 그것을 지지한 좌익문인들의 각종 논문에 대한 반박에 조연현, 임긍재와 함께 앞장섬. 그때 를 「백민」에 발표하여 좌익 문인들의 결정서를 통렬히 규탄. 그는 순수 문학론을 옹호하면서 좌익 문인들과 논쟁하는 가운데 본격문학이란 말을 사용.
1948년 제1평론집 「문학과 인간」을 간행, 단편 ‘역마’ 발표. 문학평론 , , , , 을 발표, 창작집 「황토기」를 간행.
참고문헌
< 참고 문헌 >
김동리 삶과 문학, 김정숙, 집문당, 1996
김동리 소설 연구, 조회경, 국학자료원, 1999
한국현대작가론, 김봉군 외, 민지사,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