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와 성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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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근대”와 성담론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조선사회에서 성이 의식적 탐구의 대상으로 담론화되지 못한 가운데, 여성의 성이랑 남성에 비해 자연스럽지 못한, 감추어야 할 금기의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1920년대 초, 근대에 들어와서 신여성의 등장으로 성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여성담론의 하나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여성도 성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성담론의 형성은 당시 새로운 성문화가 실재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배하에서 전통과 근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계급과 성 등 다양한 사회적 담론들이 대립된 가운데 , 신여성은 피식민지민이자 근대적 가부장제하의 여성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와 남성에 의해 타자화된 이중의 종속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신여성들의 모습과 이념들을 알아봄으로써 한국의 근대는 식민지적 근대성이었음을 확인해보겠다.
1. “식민지 근대”와 신여성
한국의 여성들이 근대적인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 계기는 여성들 스스로 찬양회운동, 국채보상운동과 같은 한말의 구국운동에 참여하면서부터인데, 이러한 여성의 근대의식은 1920년대에 등장하는 신여성을 통하여 보다 진보된 형태로 표출되었다.
신여성을 몇몇 선구적인 여성의 출현으로 보기 보다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의 등장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에는 일부의 지식 여성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들 소수의 신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된 이미지는 1920~30년대 한국의 일반 여성들이 지향해야 할 표준적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신여성을 어떤 여성들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당시에도 특별히 그 개념이 규정된 것은 없었지만, 당시 일반인의 눈에 비친 신여성-구여성 판별의 절대적인 기준은 근대교육의 수혜 여부였다. 신여성이 교육을 통해 얻은 지식은 근대의 지표로써 사회적 존경과 함께 구여성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넘어 일종의 권력으로까지 작용하였다. 신여성들은 식민지 조선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인 역할과 책임에 대한 고민보다는, 남녀평등-자유연애-자유로운 성애와 같은 개인적 욕망의 실현을 보다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였다. 즉 신여성들은 개성과 이상을 추구하며, 개인주의적 지향이 강하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자유주의자요, 전통과 인습에 도전하였다는 점에서 급진주의자였다. 이처럼 신여성들이 때로 전통에 도전하고 회의하였던 것이 궁극적으로는 전근대의 성모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는 점에서, 신여성의 “욕망”은 그자체가 근대화의 필연적인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여성들은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이 지상과제였고, 계급해방이나 여성해방은 부차적인 문제로 인식되던 당시에 있어서, 자유연애-자유결혼 등을 실천하면서 전통적인 여성성에 도전하였던 초기 신여성의 여성해방론은 식민지배 -민족해방-근대화라는 지배적인 담론들에 의해 억압되고 좌절되었다. 근대적 가부장제하의 성모순을 해체하려는 신여성들의 이러한 노력은 너무도 쉽게 개인의 문제에만 관심을 가진 자유주의 부르주아 여성운동으로 단전되고 단죄되었다. 즉, 일제의 식민담론 앞에 계급담론이나 성모순에 대한 여성해방론은 부차적이고도 종속적인 것이었으므로 전통적 성모순을 해체하려는 신여성들은 곧 일탈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2.부르주아 신여성의 성담론
1)연애 열풍
1920년대에 본격화된 연애의 주역은 신여성과 ‘신남성’으로, 이들의 새로운 사랑방식에 결정적인 영항을 미친 사람은 스웨덴의 여성운동가 엘렌 케이였다. 그녀는 남녀 결합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연애와 사랑으로 보고, 사랑이 전제된 것이라면 그 결혼이 어떤 것이든지 도덕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남녀가 영혼과 육체적 감각이 일치된 사랑으로 결혼했다고 해도, 그 사랑이 식었다면 단호하게 이혼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자유이혼 주장은 당시 조혼으로 혼약의 의리와 연애에의 갈망 사이에서 고민하던 신남성들에게는 하나의 복음이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흐름으로써 이제 남녀가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공간 또한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신여성, 신남성 이라고 해서 모두 자유연애에 동의 한 것은 아니었다. 즉, 연애열풍에 취하여 처자식을 돌보지 않은 남자의 파국을 지적하면서 “연애가 들뜬 유행에 지나지 않으며, 젊은 남녀의 사랑 또한 춘정에 지나지 않는다.”, “연애란 성욕의 충동으로 일어나는 동물적 사랑으로 연애지상주의는 상대방의 결점을 보지 못하고 무조건 미화하는 것이 맹점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2)신정조론
‘연애 신성’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실천하던 1920년대 신여성의 삶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유교적인 정조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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