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 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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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 슈타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비트겐슈타인
비트겐슈타인의 일생
이번 나의 과제 주제는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이다.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이번 과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론을 조사하기 전 그가 어떤 철학자이고, 어떠한 삶을 살아온 사람인지 조사해 보았다. 그의 일생을 쭉 살펴보자면, 비트겐슈타인의 풀네임은 ‘루트비히 요제프 요한 비트겐슈타인(Ludwig Josef Johann Wittgenstein, 1889.04.26 ~ 1951.04.29.)’ 으로 1899년 4월 26일 저녁 8시30분, 오스트리아 빈 근교 노이발덱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유태계 아버지 카를 비트겐슈타인과 가톨릭 집안의 어머니 레오폴디네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다. 비트겐슈타인가는 빈 분리파 예술가들과 교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191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은 비트겐슈타인은 예술가 후원 자금으로 10만 크로네를 기부했다.
비트겐슈타인은 가정교사들에게 지도 받다가 1903년 린츠 국립실업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은 신통치 않았고 친구들과 잘 사귀지도 못했다. 재벌가 도련님으로 말을 더듬고 벌레를 심하게 무서워하는데다가 ‘당신’, ‘그대’와 같은 격식 차린 표현을 쓰는 비트겐슈타인을 동급생들은 공공연히 따돌렸다. 이 시기 비트겐슈타인은 가족의 불행을 겪는다.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집을 나간 맏형 한스가 1902년 미국에서 실종됐고, 셋째 형 루돌프는 1904년 베를린에서 청산염을 마시고 자살했고, 둘째 형 쿠르트는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선에서 자살했다고 한다.
1906년 비트겐슈타인은 베를린-샤를로텐부르크 기술전문대학에 등록하고 이듬해 아버지의 권유로 영국 맨체스터 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기계공학부 연구생으로 등록해 항공 엔진과 프로펠러 제작을 연구했다. 이 시기부터 비트겐슈타인은 수학의 근본에 관한 문제, 수학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면서 버트런드 리셀과 만났다. 리셀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정열적이고 심오하고 강렬하고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천재의 완벽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1912년 가을 학기부터 그는 철학에 이런 자세로 임했다고 한다. “베토벤의 방문 앞에서, 그가 새 곡을 놓고 저주하며 신음하고 노래하는 것을 들은 한 친구가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베토벤이 문을 열었다. 그는 마치 악마와 싸웠던 사람 같았고, 그의 격노를 피해 요리사와 하녀가 떠났기 때문에 36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케임브리지에서 리셀을 통해 G.E.무어, 경제학자 케인즈 등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철학에 몰두하던 비트겐슈타인은 제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노르웨이의 협만 근처 시골 마을에 칩거했다. 전쟁이 일어나자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군에 자원 입대하여 포병으로 동부 전선과 남부 티롤에서 근무하다가 1918년 11월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됐다. 전쟁터에서도 그는 수첩에 자신의 철학을 부지런히 메모했다. 사실상 그때의 메모는 ‘논리철학논고’를 이미 완성했었다고 볼 수 있다.
1919년 그는 빈에서 교사 양성 교육을 받고 빈 근처 수도원의 보조 정원사로 일하다가 1920년 오스트리아 동북부 시골마을 트라텐바흐의 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이후 하스바흐, 푸흐트베르크 등에서 1926년까지 교사로 일했다가 학생 체벌 문제 때문에 사임했다. 이후에도 잠시 수도원의 정원사로 일했고, 빈의 막내 누나 마르게레테를 위한 집을 설계, 건축하여 1928년 가을에 완공했다. 1929년 초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같은 해 6월 ‘논리철학논고’를 학위 논문으로 제출하여 박사학위를 받고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이 됐다. 그의 제자 노먼 맬컴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강의라기보다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독창적인 연구 그 자체였다. 그는 질문을 던졌고 학생들의 대답에 다시 반응했지만, 때때로 어떤 생각을 짜내려 할 때는 학생들의 말을 멈추게 했다. 비트겐슈타인의 간헐적인 중얼거림과 좌중의 숨죽인 시선이 이어지는 긴 침묵, 그는 극도로 긴장되어 눈은 한 곳을 응시했고 표정은 준엄했으되 얼굴에 생명감이 넘쳤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자신이 고도로 심각하게 몰입되고 지적인 힘이 충만하게 된다는 느낌에 휩싸였다.”
30년대 전반 그는 강의와 연구에 몰두했다. 철학교수가 아닌 노동자로 살아가고자했던 그는 1935년에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소련을 방문했지만 포기하고 돌아왔다. 1936년 봄 연구원 임기가 끝나자 다시 노르웨이의 협만 오두막에 칩거했다. 1937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왔고 1939년에는 G.E.무어의 후임으로 철학과에 임용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교수취임을 하지 않고 런던의 가이 병원 약국의 배달 사원으로 일했으며 나중에는 왕립진료소 임상연구 실험실에서 일했다.
1944년 가을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비트겐슈타인은 1947년 사임했다. 그는 철학 교수로서의 삶을 ‘살아 있는 죽음’으로 묘사했다. 케임브리지를 ejSKS RMSMS 잠시 아일랜드에서 살았다. 골웨이 해변 오두막에서 지내는 그를 주변 어부들은 경외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길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새들이 그의 어깨와 팔에 앉곤 했다는 것이다. 1949년 코넬대학의 노먼 맬컴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가 잠시 머물고 돌아온 뒤 전립선암 진단을 받았다.
이른바 ‘전기(前期) 비트겐슈타인’과 동일시되기도 하는 ‘논리철학논고’를 통해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이 모든 철학적 문제를 해소시켰다고 여겼다. “철학적 저술에 기반을 둔 대부분의 명제와 질문들은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들이다.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답도 할 수 없다. 다만 그것들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는 걸 입증할 수 있을 뿐이다.” ‘논리철학논고’의 비트겐슈타인에 따른다면 언어의 기능은 세계를 묘사하거나 모사(模寫)하는 것이며,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사실 또는 실재가 있는가에 관한 것뿐이다. 사실 또는 실재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세계의 뜻은 세계 바깥에 있어야 한다. 세계 안에서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있으며, 모든 것은 일어난 그대로 일어난다. 그 안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은 세계 안에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시간과 공간 안의 삶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결은 시간과 공간 바깥에 있다.” “실로 언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드러난다. 그것이 신비스러운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거의 모든 철학적 명제들은 참이나 거짓이 아니라 헛소리다. 세계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다시 말해서 언어를 초월한 것에 관하여 말하는 순간 그것은 헛소리다. 형이상학, 윤리학, 종교, 예술 등은 말할 수 없고 단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논리철학논고’의 이 마지막 말을 끝으로 철학과 결별하려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그러나 철학으로 돌아왔다. 이른바 ‘후기(後期) 비트겐슈타인’이다. 식료품점 점원에게 ‘다섯 개의 빨간 사과’라고 적은 쪽지를 주었다고 해보자. 쪽지를 받은 점원은 쪽지의 내용대로 빨간 사과 다섯 개를 골라 줄 것이다. 쪽지에 적힌 내용에 대한 점원의 이해 여부는 그가 그 내용대로 ‘행동하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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