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비어천가」 분석과 지도 방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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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용비어천가」 분석과 지도 방안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전문학 교육론
「용비어천가」 분석과
교육 방안
-차례-
I. 「용비어천가」의 내용과 형식
1. 들어가며
2. 「용비어천가」의 개관
3. 내용 구조
4. 형식 구조
5. 철학적 구조
6. 나오며
II. 「용비어천가」의 교육적 의의와 교육 실태
1. 교육적 의의
2. 교육 실태
3. 종합
III. 「용비어천가」 교수 학습 방법
1. 기존 연구 소개
2. 교수 학습 방법 제안
Ⅰ. 「용비어천가」의 내용과 형식
1. 들어가며
「용비어천가」는 조선 왕조의 개국을 칭송하는 국문가사와 그에 대한 한문 주석을 싣고 있는 책으로, 10권 5책, 총 12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445년(세종 27) 4월에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 권제(權) 등이 세종의 6대조를 기리는 125장의 국문시와 같은 내용의 한시를 만들어 세종에게 바침으로써 『용비어천가』가 처음 이루어졌으며, 1447년(세종 29) 2월에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강의안(姜希顔), 신숙주(申叔舟) 등에 의해 주석 작업이 마무리되었다.
「용비어천가」은 훈민정음으로 표기된 최초의 문헌으로 15세기 중세국어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귀중한 어학 자료이며, 「월인천강지곡」과 함께 악장 문학의 대표작으로써 국어국문학적인 측면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여말선초의 여진족과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사료이기도 하며, 주석은 역사와 지리적 측면에서도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앞서 잠시 언급한 「용비어천가」의 국어국문학역사학 측면의 가치 중에 국문학적 가치에 초점을 두고 「용비어천가」의 구조를 내용형식 철학적 측면에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2. 「용비어천가」의 개관
(1) 제작 동기
「용비어천가」의 창작 동기를 밝히기 위해서는 악장에 대한 세종의 견해를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제 회례(會禮) 때의 문·무무(文武舞) 등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에 대하여 박연이 말하기를 ‘마땅히 지금의 일을 가영(歌詠)하여야 합니다.’고 하였으나 내가 생각해 보니, 대체로 가사라는 것은 성공을 상징하여 성대한 덕을 송찬(頌讚)하는 것이다. 내가 살피건대 주(周) 무왕(武王)은 무(武)로써 천하를 평정하여 성왕(成王) 때에 이르러 주공(周公)이 대무를 지었다. 역대에 다 그렇게 하였으니 지금 세상의 일을 가지고 가영(歌詠)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나는 다만 왕위를 이었을 뿐인데 무슨 가송(歌頌)할만한 공덕이 있겠는가. (중략) 만약 반드시 그때그때의 세상일로 노래를 지어야 한다면 왕위를 계승하는 임금은 모두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가영할만한 것이겠는가.
위의 인용문은 세종의 악장관(樂章觀)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이다. 그가 제기한바 기존 악장들의 통폐는 ‘가송 대상의 현재성’이었다. 즉 악장이 왕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해 지어지는 것이라면, 어떤 왕이나 모두 가송(歌頌)할만한 공이 있는 것은 아니며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특정 왕의 공적을 당대에 가송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견해이다. 이와 같은 세종의 생각은 그 때까지 이루어지고 있던 개인 제작에 착수한 것도 기존 악장에 대한 비판적 견해를 전제로 한 일이었다.
위와 같은 외적인 제책 동기 외에 세종의 입장에서 「용비어천가」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던 절박한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선초 아송문학(雅頌文學)의 출현 동인 중, ‘기득권을 수호해야 한다.’는 표어는 자기 계층 내부의 절대 명제이었을 뿐, 치자(治者) 계급으로서의 도덕적 명분상, 대외적으로 표방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세종이 최고 통치자로서 항상 염두에 두어야 했던 것이 바로 국가의 ‘이념’ 문제였다. 표방한 이념에 혼란이 생길 경우 왕조의 영속이라는 지상 과제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건국의 주체세력은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으로 무장하고 있던 신흥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이 도모한 왕조 교체 및 이성계의 즉위는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긴 했으나 무력을 앞세운 것으로서, 주자가 말한 윤통(閏統)일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세종 자신의 부왕이었던 태종 역시 윤통임은 태조와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 권근을 비롯한 건국 초기의 사상가들이 악장을 지어 올리는 등 그러한 약점을 가리기 위한 개인적 차원의 노력을 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할 수 없었다. 세종대에 이르기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태조의 왕자적(王者的) 비정통성’에 ‘태종의 왕자적(王者的) 비정통성’이라는 부담이 가중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 자신 또한 적장(嫡長)이 아니라는 결정적 흠을 지녀, 건국의 이념과 배치되는 현실이 건국 이래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짐으로써 모순과 역리(易理)의 현상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있었으며 자칫하며 ‘왕조 영속’이라는 지상 과제가 중대한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으로서는 건국 이래 3대에 걸쳐 반복된 ‘윤통’의 모순적 현실을 한꺼번에 해결한 방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대 임금의 일을 악장으로 가송할 수 없다’는 세종 스스로가 내세운 원칙에 의해 자신의 일까지 「용비어천가」에 언급할 수는 없었지만, 태조 · 태종에 대해서 만이라도 이러한 시비의 가능성으로부터 차단시킬 필요성은 절실했던 것이다. 세종 자신은 스스로가 무력이나 술수(術數)에 의해서가 아니라 부왕(父王)에 의해 선택되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조 · 태종에 대한 윤통 시비의 가능성만 해소된다면 큰 부담 없이 왕조를 지속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양적 · 질적 측면에서 목조(穆祖)에서 환조(桓祖)까지 사조(四祖)의 활약상이 태조 · 태종에 있음이 분명하다. 관점에 따라 달리 볼 수도 있겠지만, 주인공인 이태조보다 오히려 부 주인공격인 태종(芳遠)이 훨씬 혁명적으로 부각되어 있다는 장덕순의 견해를 참조한다면 태종의 왕자적(王者的) 영웅상을 강조함으로써 태종에 대해서는 물론 세종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르는 윤통(閏統) 시비를 사전에 봉쇄(封鎖)하는 효과를 에 상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효과를 전제로 할 때 비로소 조선 왕조 영속이라는 지상과제가 달성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