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 밀리언 달러 베이비

 1  영화감상 -  밀리언 달러 베이비 -1
 2  영화감상 -  밀리언 달러 베이비 -2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영화감상 - 밀리언 달러 베이비 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밀리언 달러 베이비
줄거리
권투 트레이너 프랭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유일한 가족으로 보이는 딸과 연락도 되지 않는 안과 밖으로 모두 벽을 쌓고 살아간다. 그에겐 은퇴 복서인 스크랩(모건 프리먼)과 낡은 체육관뿐이다. 그러던 중 매기(힐러리 스웽크)라는 여자 복서 지망생이 찾아오지만, 프랭키는 거부한다 하지만 복싱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던 그녀의 의지는 프랭키 조차 꺽을 수 없었고 프랭키는 그녀의 트레이너가 된다. 매기는 매경기 월등한 기량으로 이겨가며 사람들의 관심과 돈, 그녀가 꿈꾸던 성공에 바짝 다가서고 가족에게 집까지 선물한다. 프랭키와 매기는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며 가족보다 더 가족다운 관계로 발전해 간다.
그러던 중 악명 높던 상대가 기다리는 매치에 나간다. 험난한 세상을 향해 첫발을 디딘 그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치명적인 사건이 일어난다.
감상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단순히 권투에 대한 영화가 아니라 보는 관객에게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영화인 것 같았다.
누구나 한번쯤은 죽음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을 우린 본능적으로 외면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외면했을 뿐이지, 죽음을 맞이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건 아니다. 왜 우린 죽음을 두려워 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이유를 전부 다 알 수는 없다. 그 이유 중에, 죽은 뒤의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일에 닥치게 되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점도 있다. 사후에 대한 정보를 살아있는 누구도 얘기해줄 수 없고,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죽어있기에, 우린 그걸 알 방법이 없다. 또 다른 공포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추할 것이라는 짐작과 관련이 있다. 행복하게 목숨을 경영할 권리가 인간에게 있다면, 죽음의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 또한 인간의 행복권의 일부라 할 만하다.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는 한 여자 복서를 통해, 관객들에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인간 생명의 본래적 가치를 부정하고 현세의 안락한 삶이나 사회적 공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적 가치를 주장하고 있다. 현세의 안락한 삶을 실현할 수 없는 생명,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는 생명은 가치를 상실한 무가치한 존재이며 생존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본다.
한편 안락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은 절대적 존엄성을 가진 것으로 본다. 안락사는 이에 대한 반역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떠한 치료 중지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안락한 삶을 영위할 수 없고 아무런 사회적 기여를 할 수 없다고 해서 인간 생명으로서의 가치와 권리를 무시해도 되는가? 인간 생명은 살아있는 것이 더 고통스러운, 그 어떤 비참한 상황에서도 마땅히 보존돼야 할 절대적인 가치인가? 비록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과 인간은 자신의 생명과 운명의 주인이며 이를 자발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상충된다.
안락사 시킨 프랭키의 행위를 두고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우선 프랭키의 행동을 매기에 대한 사랑으로 보는 시각이다. 매기의 삶이 더 비참해지기 전에, 팬들의 환호성이 그녀의 귓가에 떠나가기 전에 매기의 생명을 끊어 준 프랭키의 행동은 매기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쉽사리 할 수 없는 일이다. 반면 프랭키의 행동을 ‘단순 살인’으로 보는 관점도 가능하다. 매기가 안락사를 원했다 하더라도 신조차 거둬갈 수 없는 인간의 목숨을 인위적으로 앗아간 프랭키의 행위는 용서 받지 못할 죄이며 명백한 범법 행위로 볼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안락사는 환자로 하여금 삶의 의지를 포기하게 만듦으로써 자행되는 살인행위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신이 아닌 이상 생의 마감 시점을 예측할 수 없다. 시한부 선고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들, 수십년간 식물 인간 상태로 있다가 깨어난 사람들, 심지어 장례중에 관속에서 깨어난 사례도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은 극히 낮은 확률이므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낮은 확률을 들어 한 존재의 생존 가능성을 짓밟는 행위는 살인과 다름없다.
안락사는 편안한 죽음 이라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했으나, 사실 생명 외적인 잣대에 의해 생명의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인간의 기본적 품위 유지를 위한 일이다, 편안한 생의 마감을 위한 일이다 같은 말은 건강한 자들의 배부른 핑계일 뿐이다.
세상에서 사후의 실체를 알고 있는 이는 존재할 수 없다.
죽음의 실체조차 모르는 이들이 평가하는, 품위 있고 편안한 죽음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므로 안락사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환자로 하여금 죽음을 강요하기보다는, 국가의 의료복지를 확대하고,의약품 연구개발을 통해 환자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줌으로써 환자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심어주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죽음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귀중한 생명을 현실적인 편의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생을 마감 시킬 수 있는지는 깊이 숙고해야 할 인간들의 윤리적인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