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으로서의 최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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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언론인으로서의 최남선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최남선 가계와 성장 -------------------------(2)

2. 한국잡지사-초기 잡지사 중심으로 --------------(3)

3. 언론인으로서의 최남선 ---------------------- (7)

4. 육당 최남선의 친일행적 --------------------- (11)

5. 언론인 최남선의 친일행적에 대한 평가 --------- (13)

6. 함의 ------------------------------------ (14)

* 참고문헌 --------------------------------- (15)
본문내용
1. 최남선 가계와 성장

최남선은 1890년 4월 26일 부친 최헌규와 모친 강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한성 중부 상이동에서 태어났는데, 20세기의 전반부 50년의 시대적 공간, 특히 식민지하 40년(1905~1945)이 그의 중요한 문화활동 기간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가장 대표적인 “식민지 지식인”의 굴절된 전형이 될 시대 환경적 요인을 안고 있었다 하겠다.
그의 부친 최헌규(1859~1933)는 개화기 변화의 물결을 빨리 읽고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여 자신의 가문을 중흥시키고자 했던 인물이다. 그는 1879년 21세로 식년시 지리학에 합격한 후, 1903년 경릉(헌종릉) 봉안시 상지기사, 1904년 상지관, 관상소 기사(6품)를 역임했다. 칙임관까지 지낸 최헌규는 기술관 중인으로 매우 출세한 인물이었다. 최헌규는 3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 둘 딸 하나를 일본으로 유학시키는 데서도 개화기에 빠르게 적응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최남선이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최헌규가 관상소 기사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남선이 기술관 중인 가문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향과
행적을 파악하는데도 실마리를 준다. 그는 중인 계층의 이해 타산
적이고 공리적 사고를 이어 받고 있었다. 이해 타산적이고 공리
적인 성향은 그가 근대 문명을 빠르게 흡수하는 데도 작용했지만,
시류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요인으로도 작용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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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제연구소(1993) , 서울: 역사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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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현 (2003) , 서울 : 늘푸른 소나무
정진석 (2001) , 서울: 창작과 비평사
정진석 (1985) , 서울: 전예원
정진석 (1999) , 서울: 커뮤니케이션 북스
황민호 (1992) , 서울: 啓明文化社 계명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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