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관리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

 1  일본관리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1
 2  일본관리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2
 3  일본관리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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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관리들의 야스쿠니 신사참배에 관한 고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근대일본의 한,중침략과 과거사 문제
2.본론
-야스쿠니
3.결론
4.출처

본문내용
1. 서론
- 근대 일본의 한, 중 침략과 과거사 문제
①주변국 침략의 불가피성 주장
⑴ 한국 침략을 정당화하는 강점합법론(强占合法論)
* 일본의 역사 교과서마다 한국강점(韓國强占)에 관한 내용을 장황히 서술
-야마가와 출판『고교일본사B』261쪽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와 국제정세와 함께 ‘한국병합’ 문제를 서술
(“러시아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감독권을 전면적으로 인정했다”는 내용)
* ‘조선왕조’라고 표기해야 하는데도 굳이 ‘한국’ 국명을 씀- 오늘날의 한국을 얕잡아보는 의도. (역사학에서는 당시의 고유 국명을 써야 하는 것이 상식)
* 이 교과서의 내용 중 이토 히로부미가 허얼빈에서 한국의 테러리스트 안중근에게 암살되어 이듬해 한국병합조약을 맺어 이씨 왕조는 끝이 났다”는 내용이 있음
① 교과서에서는 마치 한국이 스스로 외교권을 일본에 ‘이양’한 것처럼 서술,
②이토 히로부미 피살이 ‘한국병합’의 결정적인 요인인 것처럼 왜곡.
③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안중근을 ‘악랄한 테러리스트’로 묘사

⑵ 경술병합늑약(庚戌倂合勒約)은 원천적 무효
* 역사를 올바로 기록하고자 노력하는 일본인 학자 가운데는 한·일간의 일련의 조약은
일본이 불법으로 체결한 조약이었다고 지적하고 있음
→ 나가츠카 아키라는 “당시 일본의 대(對)조선정책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제국주의 열강의 용인 아래 실행되었다고들 한다. 그러나 조선 조정과 조선 민중이 일본과 완전히 평등한 입장에서 한국병합에 이르는 여러 조약을 체결한 것이 결코 아니 었다”고 주장
→ 에구치 보쿠로도 “일본의 경제적·정치적 세력 신장이 일청전쟁의 승리, 조선 침략, 의화단 봉기에 대한 간섭이며 인근지역에 대한 침략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여지도 없다” 고 역설

* 1995년 10월 16일, 한국의 국회의원들은 “대한제국의 조약 체결권은 고종 황제가 서명을 거부, 옥새를 날인하지 않은 사실이 그 원본에 의해 확인되었으므로 을사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의결

* 일본 외무성 자료인『일본외교문서』제27권 제1책의 오시마 게이스케[大島圭介] 보고서의 조선 왕궁 침범 내용- “새벽 4시경 왕궁 주변으로 (일본군이) 진입하는데 느닷없이 조선 군사들이 발포함으로 이에 응사하였고, 왕궁에 들어가 수호한 것이며 일본 정부로서는 결코 침략의 의사가 없었음을 보증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음. 한밤중에 조선 왕궁에 진입하는 일본 군인들을 보고 조선 경비병들이 발포한 것은 어디까지나 왕궁 보위를 위한 정당방위였는데도, 이를 조선 군인들이 먼저 발포했으므로 응전하여 왕궁에 진입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음 (적반하장의 논리)

⑶ 안중근은 일본의 위대한 정치인을 암살한 범죄자이다?
*초·중·고교 교과서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허얼빈총격의거를 싣고 있 음-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 가장 충격적인 사건의 하나
→‘소학교 사회과’를 보면 “일러전쟁 후 일본은 지금의 서울에 관공서를 두고 한국에 대한 지배를 강화. 한국인들은 널리 반일운동(反日運動)을 일으킴. 1909년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의 청년 안중근에게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는 내용. 이 글은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배제 →안중근을 조선 독립운동과 관련된 인물이라는 사실을 배제함으로써 한 청년의 우발적인 살인으로 축소

*야마가와 출판『고교일본사B』262쪽에는 한국인들의 항일투쟁과 일본의 무력탄압을 설명하고는 “1909년 이토 히로부미는 허얼빈에서 한국의 민족운동가 안중근에게 암살당했다. 그 이듬해 한국병합조약을 맺어 이씨왕조는 끝나고 한국은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는 내용.→ 언뜻 보기에는 요령 있게 요약한 글로 보이지만, 안중근을 ‘민족운동가’로 표현한 것에 주목해야 함. ‘민족운동’이란 표기는 포괄적으로는 정치성도 포함되겠지만 주로 민족개화운동, 민족의식개혁운동 등 사회적 개념으로 쓰여지는 경우가 많음. 따라서 일본의 불법적 병탄을 감추기 위해 이같이 ‘민족운동가’ 운운하고 있는 것. ‘독립운동’이란 문구를 쓰지 않음으로써 항일투쟁을 축소·평가하여 교육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⑷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은 아시아 제(諸)민족의 해방을 위한 성전
참고문헌
http://www.reportshop.co.kr/data/data_view.html?rpID=105609(일본대중문화의 이해 {원광대학교 일본어교육연구회 저})http://apache630.tistory.com/392http://blog.empas.com/solim122/8824254http://blog.naver.com/doctor007?Redirect=Log&logNo=150007315226http://english.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a10200&no=224573&rel_no=1http://apache630.tistory.com/392http://kin.naver.com/detail/detail.php?d1id=6&dir_id=61402&eid=CTP4p00t7hx8MPDq99FlJQ5zA+PI4yJA&qb=vt+9usTttM8gvcW758L8ueggsKKxuSDFwrW1&pid=fM48Hsoi5Twssb5cMfRsss--167867&sid=SOI5iacL4kgAAF4s3@Q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52930http://www.yeongnam.co.kr/Pdf/2007/06/08/220101-08062007999.pdf
(다카하시 데쓰야, 역사비평사)(자료:동아일보.2001.08. 14, 화요일, 제24902호, A1)
야스쿠니 문제 (다카하시 데쓰야 / 역사비평사)
야스쿠니의 일본, 일본의 야스쿠니 (고야스 노부쿠니/ 산해)
동아일보 2004.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