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답사기] 운문사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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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화유적답사기] 운문사 답사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운문사
신장상(神將像)
1. 신장이란?
2. 우리나라의 신장 신앙
3. 신장의 종류

우리나라 토기의 발달
1. 토기 제작방법
2. 빗살무늬 토기와 그 이전
참고문헌/자료
본문내용
숙종 44년 채헌이 지은 경상도 청도군 동 호거산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운문사는 진문제가 원년에 한 도승이 대작갑사로 창건한 다음 그 뒤에 원광법사가 수 문제 개황 11년(591)에 이곳에 머물면서 제 1중창을 하였고, 그 뒤 후삼국시대에 보양선사가 이곳에 주석하며 고려 태조의 귀의를 받아 토지 5백 결과 운문선원의 사면까지 하사받고(937) 제 2중창을 이루었으며, 그 다음은 고려 원응 국사가 이곳을 하산소로 삼아 내려온 이래 제 3중창(1192)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신제 고려후기에 운문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삼국유사'를 쓰고(1281년에 완성) 있었던 일연선사는 '삼국사기' 권 4 원광서학과 보양이복에서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아무 관련도 없으며 원광전에 운문사와 대작갑사 및 이목의 관련 사실을 붙여 놓은 것은 향인 김척명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못 듣고 원광전에 보태 놓았기 때문이라고 일축하며 그 얘기의 내용은 운문사 개산조인 보양선사의 사적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고 있다. 이 잘못된 내용을 각훈이 '해동고승전'을 지으면서 그대로 실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면 운문사는 분명히 보양 선사의 개창이 틀림없을 듯한데 보양 선사를 가지산문 계통으로 본다면 작갑의 설화가 까치곳 즉 가지산의 의미로 훈역될 수 있으므로 더욱 그 타당도가 높아지게 되며 지금 남겨져 있는 석탑이나 석등 및 작갑전 안에 모셔진 석가여래좌상과 사천왕부조석상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일연선사의 설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