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 김시종의 `경계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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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학사상] 김시종의 `경계의 시`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서론 : 작가소개
본론 1 : 재일조선인이란?
본론 2 : 모어와 모국어
본론 3 : 재일조선인과 국적
본론 4 : 재일조선인의 삶과 저항
본론 5 : 경계인의 디아스포라적인 삶
결론 : 내셔널리즘의 허구성을 넘어
본문내용
1. 서론 : 작가소개
1) 작가소개
1929년 원산에서 태어나 제주도에서 성장한 후 1949년 일본에 건너갔다. 1953년 시 동인지 「진달래」를 창간했으며, 일본어로 시 창작 및 비평, 강연 활동을 꾸준히 계속해 오고 있다. 1986년 수필집 로 '마이니치 출판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등이 있다. 1991년 집성시집 원야의 시로 '오구마 히데오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일역으로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재역 조선시집」등이 있다. 허남기와 더불어 대표적인 재일 1세대 시인에 속한다. 여느 1세대 재일작가들처럼 김시종 또한 사상적 대립과 갈등 속에서 힘겹게 문학적 도정을 일궈냈다.

2) 작품, 작가의 개괄적 설명
‘자서(自序)’는 1955년도에 간행된 첫 시집 ‘지평선’의 맨 앞을 장식한 시다. 시인 자신의 표현대로 철저한 ‘황국의 소년’ 이었던 그는 마침내 해방이 되자, 일본인에서 한순간 조선인으로 탈바꿈해버린 자신의 정체성의 큰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1946년 최현선생을 따라 광주에서 참가하게 된 ‘제고장찾기운동’은 궁핍한 민족 현실에 눈을 뜨게 하는 사상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 하에서 무지했던 자신을 동감하면서 그는 사회.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고, 미군정이 실시되던 당시 시대에서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결국 그는 제주도에 부모님을 남겨둔 채 일본으로 건너왔고, 1948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재일’의 삶이 이어졌다. 시집 ‘지평선’ 은 1950년부터 1955년에 걸쳐 쓰인 시들의 모음집이다. ‘지평선’이라는 제목은 희망과 망향의 심정을 담은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1949년 8월 김시종은 일본공산당에 입당하면서 재일조선인 운동의 조직 활동에 뛰어든다. 한편 그의 시 창작은 1950년 5월 26일 신오카사신문에 첫 일본어 시 ‘꿈같은 일’이 게재됨으로써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비교적 평이한 시어로 쓰인 이 시 는 20대 초반의 꿈 많은 젊은 시인 김시종의 일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일본에 건너온 지 얼마 안 되어 김시종은 우연히 들른 오사카 난바의 고서점에서 시인 ‘오노 토자부로’의 시론을 만난다. 시론과의 만남에서 얻은 충격은 이후의 김시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이 시론에서 그때까지 자신이 알고 있던 일본어와는 분명히 다른 “서정의 과학”을 말하는 “예지의 일본어”를 발견했으며 “‘서정’이라고 하는 흔히 영탄의 감정으로만 인식하고 있던 감정의 표출이 실은 인간의 사유와 사고의 저변을 이루는 내면적 질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점은 김시종의 시 세계를 떠받치는 중요한 축으로서, 그의 시가 어떤 시류나 유행에 경도 되는 법 없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해 온 요인이 된다.
일본 정부에 의해 강제로 폐쇄 되었다. 나카니시 조선소학교의 개교활동, 1951년 10월에 결성된 오사카 ‘재일조선문화인협회’에서 발간된 종합지 조선평론에 참가, 1953년 2월 젊은 시인들을 주축으로 만든 시 동인지 ‘진달래’ 창간을 주도하는 등의 활약이 말해주듯, 김시종은 정치적으로 문학적으로 오사카 재일조선인 사회의 움직임 한가운데 있었다. 시집 ‘지평선’의 서문에서 오노 토자부로는 “김군의 시 운율은 슬픈 조선의 옛 노래가 지닌 영탄을 벗어나 밝고 힘차며, 이는 우리 일본 시인들에게 용기를 준다.”고 적었다. 자서는 시인 자신의 존재 확인과 더불어 미래를 향한 출발의 걸음을 확고하게 내딛는 자세를 보여준다.
한편 재일조선인 조직인 ‘ 재일본조선통일민주주의통일전선’이 운동을 직접 북조선의 지도하에 두게 되는 현재의 ‘총련’로 바뀌면서 노선 전환에 따른 조직 내의 반발이 생겨난다. 특히 1959년 7월에 발표한 에세이 ‘장님과 뱀의 입씨름’과 시 ‘오사카총련’이 총련으로부터 정치적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 에세이에서 김시종은 자신이 “‘재일’이라는 부사를 달고 있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하였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같은 해 11월 김시종의 제 2시집 ‘ 일본풍토기’가 간행되었다. ‘일본풍토기’에서 소제목 ‘개가 있는 풍경’을 달고 있는 시 ‘정책발표회’는 당시 혼미를 거듭하는 전후 일본공산당의 쇠퇴를 택시에 치여 전차 선로에 널브러진 개의 이미지를 빌려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진달래’창간 동인의 한사람이었던 작가 양석일은 ‘일본풍토기’에 실린 시인의 강한 의지는 ‘재일이 조선’이라는 방법론의 확립을 향해 한 발 내디딘 시기에 나온 것으로 정치적 대립이 격심한 시기였던 만큼 남북조선을 등거리에 두고 자기 검증을 시도한 김시종의 재일론은 너무나 급진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조총련과의 갈등으로 인해 김시종은 자연히 재일조선인 운동의 조직으로부터 멀어졌고 급기야 ‘진달래’의 해산으로 이어졌다. 제3시집으로 예정되었던 ‘일본풍토기2’는 중단되었고 원고도 분실되고 말았다. 이후 거의 10여년이 지난 뒤에야 김시종은 장편시집 ‘니가타’(1970)을 발간했다. 니가타는 일본 혼슈 중부 지방 동북부의 동해에 면한 현청 소재지이지만, 김시종의 니가타는 재일 한국인을 실은 북한 귀국선이 최초로 출발한 항구로서 그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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