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의 국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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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기의 국어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개화기 초
1-1. 독립신문

1-2. 종교운동이 한글운동에 미친 영향

1-3.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국어운동

2. 개화기와 그 후

2-1. 조선어학회

2-2. 국어사전 편찬과 맞춤법 통일안

1) 조선말 큰 사전 편찬
2) 맞춤법 통일안
2-3. 조선어학회사건

2-4. 계몽운동

1) 브나로드 운동

2) 문자보급운동

본문내용
1-2. 종교운동이 한글운동에 미친 영향
1882년 5월 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 후 기독교는 비교적 순탄히 조선에 들어와 사회 전반에 다양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 기독교 사회는 구한말 이후 성경보급을 용이하게 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한글을 적극 권장하고 교육하여 한글보급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한글 창제 이후 가장 획기적인 한글보급운동의 하나이기도 하여 바야흐로 한자영향으로부터 실질적인 자주적 한글언어의 대중적 실용화에 크게 기여한 운동으로 받아들여진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한글운동의 배경에는 바로 19세기 친 중국적인 문화에 대하여 우리의 민족적 자주성과 그 의지를 다시 확인하려는 의미가 있음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미 중국에서 들어온 한자로 된 성경은 한자라는 ‘외국어’로 된 성경으로 인식이 되어 있었고 한글성경의 발간은 당연한 우리 민족의 우리글의 역할을 인식한 터 위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한자성경과 다른 한글성경의 종교적인 강조는 우리와 중국의 `다름'에 대한 민족의식을 더 한층 심화시키고 또 하나의 민족자주의식을 확인시켜주는 의미를 지녔다.

1884년 - 이수정은 중국, 일본어의 성경을 대본으로 하여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그해 한국 선교사로 오는 호라스언더우드 및 헨리 아펜셀라 선교사가 일본에 들러 이수정역 마가복음을 들고 한국에 부임하게 되었다.
1889년 - 한영문법, 언더우드 목사가 한국 최초로 펴낸 영문 한국어 문법책.
1890년 - 한영자전, 언더우드가 송덕조라는 어학선생으로부터 한국어를 배우면서 발간한 것으로서 국판 1,800면에 달하고 약 3만 5천 단어를 수록하였으며, 이 후에 발행된 모든 사전의 모태가 되었다.
1900년 - 신약성경 출판. 1905년까지 98,498권이 팔렸다.
1918년 - 이때까지 성경 2,379,751권이 팔렸다.

1-3. 유길준의 서유견문과 국어운동
서유견문은 1895년 4월 25일 일본에서 발행되었는데 그 가치와 의미는 다음과 같다.
① 한국인이 쓴 최초의 서양견문기이다.
② 우리나라 최초의 국한문혼용체의 문장이다.
③ 개화사상을 집대성하였다.
④ 개화를 위한 교과서 구실을 하였다.
⑤ 가능한 쉬운 글을 쓰며 실생활 개선운동에 앞장섰다.
서유견문의 서문에서 유길준은 “나는 비록 우리글을 순전히 쓸 수 없음을 한탄한다.”고 전제하고 “상하부천과 부녀자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쉽게 알아보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억수 “개화기의 국어교육 실태와 국어교과서 분석고찰” 1980년


2. 개화기와 그 후
1908년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 창립 후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던 한글의 통일과 보급 운동이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 운동인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확대되자, 일제는 한글 운동을 탄압하여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날조하여 한글 운동을 엄금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1942년 국어사전의 초고가 거의 완결되었지만, 모두가 풍비박산이 되고 만다. (이 때 준비된 사전은 광복 이후인 1947년에야 비로소 ‘조선말 큰 사전’으로 완성되게 된다.)
또한 각 언론사의 주도로 한글 강습회가 개최되어 문자 보급 운동, 브나로드 운동 등이 시작되며, 한글 맞춤법 통일안 보급회가 조직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1936년부터는 가로 풀어쓰기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운동은 원래 1914년 경 주시경이 주로 주장한 것으로 이전까지 있었던 여러 의견을 종합한 안이 임시 안으로 채택되기까지 한다.

2-1. 조선어학회
국어연구 및 국어운동단체. 1908년 8월 31일, 주시경을 중심으로 하여 ‘국어연구학회’가 창립되었는데, 1911년에는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에는 ‘한글모’로 그 이름을 바꾸었으나 1914년 주시경 별세, 1915년 김두봉 망명으로 그 활동이 일단 중단되었다. 1921년 12월 3일 임경재(任璟宰)·최두선(崔斗善)·이승규(李昇圭)·장지영(張志暎)·권덕규(權悳奎)·이규방(李奎昉)·신명균(申明均) 등이 서울의 휘문의숙(徽文義塾)에 모여 ‘조선어연구회’로 한글모를 재건하였다. 1931년 1월 10일의 총회 결의에 따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광복 뒤 1949년 9월 5일 정기총회에서 다시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른다. -(((((광복 뒤 1949년 까지 학회 명칭을 조선어학회, 배달말글몯음 등으로 표현한 것은 국어에 미치지 못한 당시 한글의 위상을 국어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① ‘한글날’ 제정: 1926년 음력 9월 29일에 훈민정음 반포 480년을 기념하면서, 이 날을 ‘가갸날’이라 했는데, 이것이 지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