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

 1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1
 2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2
 3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3
 4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4
 5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5
 6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6
 7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7
 8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8
 9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9
 10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한국정치] 한국 전쟁 이후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문제제기

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실태

1. 개념정립
ㄱ. 민간인 학살이란?
ㄴ. 어느 시기를 다룰 것인가?
ㄷ. 누구에 의한 학살인가?

2. 민간인 학살 사건의 개요와 실태
ㄱ. 작은 전쟁기의 학살
ㄴ. 한국전쟁 초기의 학살
ㄷ. 한국전쟁 후기의 학살

Ⅲ.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원인 분석

1. 국외 사건 사례를 통한 분석
2. 해방 이후 정치권력을 통한 분석
3. 정치권력 변화에 따른 민간 내부간의 갈등분화와 학살
4. 미군전략에 따른 학살

Ⅳ. 결론

본문내용
2. 민간인 학살 사건의 개요와 실태
ㄱ. 작은 전쟁기의 학살
(1) 제주 4.3사건
정부수립 직전인 미군정기에 발생한 제주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에서 발생한 경찰폭력을 기점으로 다수의 제주도민 사망이 계기가 되어 1948년 4월 3일 소요사태가 발생, 1948년 10월 미군주도로 군경과 서북청년단 등에 의한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이 전개되고, 1954년 9월 21일 제주도에 계엄이 내려지고 해제되기까지 무장세력 진압과정 중에 불법적인 학살이 자행된 결과, 당시 제주도민 전체인구의 10%에 가까운 3만명 이상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는 참상을 겪은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2000년 6월부터 2001년 5월까지 4•3사건 관련 희생자 신고접수를 받은 결과, 신고 희생자는 총 14,028명으로 집계(사망 10,715명, 행방불명 3,171명, 후유장애 142명)되어 학계에서 추정하고 있는 인원의 절반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는 유족 중에서 신고하지 않은 사람들이 상당수 파악되고 있고, 육지교도소 수감자에 대한 집계 포함 여부와 특히 일부 백조일손과 같은 유족회(예비검속자 유족모임)에서는 4•3사건과 성격이 다르다고 하여 피해신고 자체를 반대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전쟁 이후의 예비 검속자 희생까지 감안하면, 4•3으로 빚어진 민간인 학살 인명 피해는 ‘3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2)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4연대의 대다수인 3천 여명이 제주 4•3사건의 진압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벌인 군인봉기에 여수의 지방좌익이 가세하고 이승만의 실정과 경찰의 학정에 반항하여 민중봉기로 발전한 것이 여순사건이다. 불법적 계엄령에 근거한 이 사건의 진압과정과 부역자 처벌과정에서 주민들에 대한 보복적인 테러, 학살, 약탈, 방화행위가 대대적으로 자행되었다. 여순 사건 민간인 학살의 현황은 다음과 같다.
사건발생지역 피학살지 피학살자 수(명) 학살가해자
여순사건 지역 여수 5,000 10,000
(지금까지의 실태조사를 통한 추정치 포함) 국군, 경찰,
반군, 지방좌익
순천 2,200
보성 400
고흥 200
광양 1,300
구례 800
곡성 100
계 10,000 국군 등 : 95%
반군 등 : 5%

(3) 그 외
거창지역, 산청군 시천삼장, 함양 도북, 문경 석달마을, 거제지역 학살 등
ㄴ. 한국전쟁 초기의 학살
(1)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학살
국민보도연맹 학살사건은 한국전쟁 발발직후인 1950년 6월 하순부터 8월까지 두 달 남짓한 기간에, 평택이남에서 제주에 이르는 전국 각지에서 최소 20만에서 30만에 이르는 민간인이 단지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군•경 및 우익단체에 의해 아무런 재판절차 없이 계획적, 조직적으로 예방 학살된 한국 현대사 최대의 집단학살이다. 단일 사건으로는 최대 규모의 피해가 발생했고, 이 시기에 수많은 다른 보복학살의 악순환 고리로 작용한 사건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삼일만에 점령된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평택 이남에서 보도연맹원에 대해 일반주민과 격리 수용 시키는 예비 검속이 단행되었다. 전국 각 시•군•면 단위의 경찰서나 지서 대부분이 예비 구금 조치를 수행하였다. 예비 검속된 사람들은 ‘A,B,C,D’ 4등급으로 분류되었고, 사상이 애매 모호한 수준으로 판단된 사람들은 A급, B급으로 C급, D급은 위험한 사람으로 구분되었으나 실제 처형과정에서는 등급에 관계없이 집단 처형되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학살현장으로 이송되었고, 작전에 투입된 군대와 비정규무장대가 이들을 처형하는 일사불란한 군•경 합동 작전이 전개되었다.
(2) 형무소 수감자의 집단학살
한국전쟁 초기에 전국 각 형무소 재소자에 대한 학살은 최상부 명령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집단 학살이었다. 인민군이 삼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서울과 경기지역의 북한 점령지에서 형무소 재소자를 석방하자, 형무소의 재소자를 미쳐 남쪽으로 이동시키지 못하게 되면서 수원 이남의 형무소 재소자에 대한 광범위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1950년 당시 형무소 재소자는 3만 7천 여명이었고 이 중 평택 이북 재소자 1만 7천을 제외한 2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보인다.
(3) 부역혐의자에 대한 학살
한국전쟁의 전선이 이동함에 따라 국군과 경찰이 후퇴하면서 또 재 점령하여 북진하면서 소위 ‘부역자 처벌’이라는 빌미로 보복성 대량 학살이 발생하였다. ‘대한 경찰전사’에는 당시 부역자를 이념적 공명과 실천을 함께 하는 적극분자, ‘반정부 감정포지자’로서 ‘소극적 공산분자’ 대세에 부화뇌동하는 소극분자, 강압 밑에 피동적으로 부역한 소극분자 등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반정부 감정포지자를 부역자로 분류하는 것은 경찰이 빨갱이와 부역자를 얼마나 자의적으로 판단하였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청년단 등 우익단체에 의해 ‘빨갱이 가족 처단’ ‘부역혐의자 처단’을 명분으로 주민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됐다. 학살 피해자는 전국적으로 10만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3) 북한 인민군에 의한 학살
인민군과 좌익단체에 의한 학살은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인민치하가 된 경기도에서 결성된 태극단 49명이 인민군에 의해서 처형되었으며 인민군 장교의 지시로 각 지역에서 학살이 이뤄졌다. 또한 빨치산활동으로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이 이루어졌다.
(4) 미군에 의한 학살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이 자행한 모든 민간인 학살 역시 미군과 관련이 있으나, 여기서는 미군에 의한 직접적인 학살 사례만으로 한정한다.
미군은 잇따른 미군부대의 결정적 패배요인이 당시 피난민을 가장한 적 게릴라의 후방 침투를 허용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북한군들로 이뤄졌거나 혹은 북한군이 통제하는 대규모 민간인들이 미군 진영에 침투하고 있다”명 민간인에 대한 사격을 합리화하고 “의심이 가는 피난민은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려 민간인과 군인을 구분하지 않았으며 나아가 민간인들을 적 또는 작전수행의 방해요소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노근리를 비롯하여 현재 미군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국방부에 민원이 제기된 지역은 대략 70여 곳이며, 이들 지역과 실태조사가 진행되면서 새로 알려지거나 아직 신고가 이뤄지지 않은 지역의 피해까지 감안해 피해자의 수치를 추정해 보면 남한에서 미군에 의한 피해 학살자의 수는 적게는 1만여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에 이를 것이다.
ㄷ. 한국전쟁 후기의 학살
학살은 제 2전선을 형성하고 있는 후방지역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남한의 경우 빨치산 활동이 왕성했던 지리산 등 산간지역의 토벌작전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으며, 북한지역의 경우 1950년 10월 이후 미군과 남한의 군•경이 북한을 40~50일 가량 점령한 시점과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 정전협상에 들어간 1951년 6월 이후 정전일 마지막까지 북한지역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서 자행되었다.

Ⅲ.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원인 분석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에 대한 개요와 실태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이 왜 일어났는지를 살펴보기 앞서 우리는 국외에서 벌어진 전쟁에서의 민간인 학살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원인 규명에 대한 접근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박찬승, 한국전쟁기 동족마을 주민들의 좌우분화, 2004
이완범, 한국 정권교체의 국제정치, 2007
전갑길, 한국전쟁 전후의 민간인학살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보고서, 2001
남재우, 한국전쟁 전후 함양지역 민간인 희생의 배경과 그 양상, 2009
강성현, 한국전쟁기 유엔군의 피난민 인식과 정책, 2008

http://www.genocide.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