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정통주의 안에서 칼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자연신학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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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 정통주의 안에서 칼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자연신학논쟁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신 정통주의 이해
1)신 정통주의 역사
(1)종교개혁 시대 이후
①칼빈
② 정통주의
③ 자유주의
2)신 정통주의
2.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
1)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2)에밀 브루너 (Emil Brunner, 1889-1950)
3.칼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신학 논쟁
4.자연신학
1)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이해
(1)칼 바르트의 자연신학 이해
(2)에밀 브루너의 자연신학
(3)바르트와 브루너 공통점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3. 칼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의 신학 논쟁

1900년이 되어 20세기가 시작되었지만 자유주의 신학자의 대가인 하르낙(Adolf von Harnack)과 헤르만(W. Hermann)의 신학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의 한복판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젊은 목사인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은 개신교 신학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근본적으로 ‘질적 차이’가 있음을 선언한 사건이었다.
바르트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 동조한 신학자인 브루너는 20세기의 종교개혁 전통을 새롭게 계승한 신 정통주의의 대변자들이 되었다. 그러나 끝내 바르트와 브루너는 화해할 수 없는 적수로 변했는데, 그것의 이유는 바로 자연신학에 관한 논쟁 때문이었다. 바르트는 일반계시와 자연신학을 부정했고, 브루너는 그것을 인정했다.
브루너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있다는 것과 자연신학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브루너의 입장에 대하여 바르트 1934년 10월 30일 종교 개혁 기념일에 출판된 「아니오」를 통해서 브루너의 자연신학을 거부했다. 이렇게 1934년부터 시작된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논쟁은 근 2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두 신학자의 초기 입장들이 다소 수정되었다. 그러나 양자 사이의 완전한 화해는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4. 자연신학

자연신학은 자연, 역사, 그리고 인간의 양심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가 나타나며 그것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단지 이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 자연 신학의 핵심이다. 성경 혹은 계시와 관계없이 인간의 직관, 도덕적 통찰 및 이성적 추론에 근거하여 신학을 하는 것이다. 자연신학은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가는데 초점을 두고, 계시 신학은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는 것에 초점을 둔다.

1) 바르트와 브루너의 자연신학 이해
(1) 칼 바르트의 자연신학 이해
브루너는 바르트와의 자연신학의 입장에 대한 차이점은 재평가해 본다면 사라져 버리는 정도의 차이로 인식하면서, 오직 은혜로(Sola gratia)란 교리와 성서만을 유일하고 궁극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보는 입장에서 바르트가 도출해 낸 결론을 서술하고 있다.
첫째, 사람은 죄인이고 단지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창조 당시의 하나님의 형상은 완전히 남김 없이 사라졌다. 인간의 이성적 능력, 문화적 능력, 인간성 등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이미 사라져 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흔적은 작은 조각조차 찾을 수 없다.
둘째, 우리는 성서의 계시만이 하나님을 아는 길이고 구원의 길이라고 인정한다. 그러므로 자연이나 양심이나 역사 속에 하나님의 일반계시를 주장하려는 시도는 철저히 배척한다. 일반계시와 특별계시하는 두가지 종류의 계시가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 유일하고 완전한 계시만이 있을 따름이다.
셋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창조와 보존의 은혜라는 것은 없다. 만일 있다면 우리는 둘 또는 세 가지의 은혜를 인정해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의 은혜가 유일하다는 것과 모순이 생겨난다.
넷째, 따라서 피조물의 보존에 관한 하나님의 법칙이 따로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되고 우리의 행동의 기준이 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런 종류의 자연법이 피조물에서 도출되어 기독교 신학에 도입되는 것은 불경한 것이며, 이교적 사고일 뿐이다.
다섯째, 같은 이유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접촉점’이 있다는 말은 부당한 것이다. 이말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의 역사, 즉 성서와 종교 개혁 신학의 핵심에 위배된다.
여섯째, 마찬가지로 새로운 창조는 옛 것을 다시 만들어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옛 것을 철저히 파괴함으로써 새 것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따라서 은총은 자연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는 말은 틀린 말이며 가장 무서운 이단이다.
이상의 것을 서술하면서 바르트의 규정이 세가지 중요한 기준 속에서 요약되었다고 브루너는 서술한다. 첫째는 바르트가 배척한 오류는 무엇보다도 비 성서적인 것이다. 둘째로 아퀴나스 주의적이거나 로마 카톨릭적 이어서 종교개혁 신학과 반대되는 것이다. 세 번째로 계몽주의나 신프로테스탄트 주의에서 유래된 것이어서 종교개혁 신학과 어긋나는 것이다.
(2) 에밀 브루너의 자연신학
첫째,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질문은 용어상의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바르트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제거되고 말았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하여, 브루너는 창세기 1:26과 시편 8편을 성서적 근거로 내세우면서 죄인인 인간이 창조의 중심이며 최고봉에 자리잡고 있다. 형식적(formal)인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로서의 이 역할 혹은 소명은 죄 때문에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전제이며, 죄를 지어도 계속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주체적이며 책임성이 있다. 인간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다른 피조물과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을 지녔으며 그것은 하나님과 공유하는 것이다. 인격의 내용은 죄 때문에 사라졌지만 인격의 형식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가진 인간성을 이루고 있다.
두 번째,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영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느낄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한 인간은 피조물을 통한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 동참해야 한다. 피조물 속의 계시를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는 성서에 대한 삐뚤어진 충성심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 을 하실 때 그 본성의 흔적을 자신의 일에 남기신다. 따라서 이 세상의 창조는 하나님의 계시이며 자기 현현이기도 하다. 성서의 어떤 곳에서도 인간의 죄 때문에 피조물 속에서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파괴된 것이 확실하다고 단언하지 않는다. 인간의 양심, 즉 책임성의 의식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다.
이어서 브루너는 계시의 두가지 측면이 존재하는가에 대하여 논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에 계시된 하나님을 잘못 표현해서 우상으로 만들었다. 어쨌든 인간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피조물에게는 전적으로 드러내 보이지 않으셨던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셨다. 여기서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로 구분할 수 있다. 또한 이중계시를 인정하면서 첫 번째는 피조물 안에 나타나는 것인데, 피조물에 있는 계시의 위대함을 아는 사람은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눈이 열린 자이고,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 아래서 계시를 명확히 알 수있고, 더 나아가 지복의 미래를 향하게 한다.
또한 브루너는 자연이란 용어를 정의하는데 자연 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 부여한 영원한 계시의 능력과 그 안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본성의 흔적에 적용될 수 있고, 죄지은 인간이 부정확한 지식으로 인한 인간의 본성에도 적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브루너는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서있는 자만이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자연적 지식(natural knowledge)을 가지고 있다.
셋째, 브루너는 전능하신 창조주와 죄라는 것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은혜로운 보존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타락한 피조물들에게 임하시는 것이 그의 보존의 은혜(perserving grace)인 것이다.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을 비추시며,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과 힘 등, 자연계의 삶과 모든 물질을 주셨으며, 이 모든 것을 보존의 은혜 또는 보편은혜(gerneral grace)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보존의 은혜안에는 자연적인 삶과 역사적인 삶을 함께 생각해야 하며, 인간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은혜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은 구원의 은혜가 아니라 보존의 은혜가 되는 것이다.
넷째, 역사적, 사회적 삶에서 지속되며 모든 윤리적
참고문헌
김영한.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서울:대한기독교출판사, 1982.
목창균. 현대신학논쟁 서울:도서출판 두란노, 1995.
마틴마티.딘피어만. 현대신학자 핸드북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3
김기홍. 신앙의 맥을 잡아주는 이야기 현대신학 베다니 출판사 2004
김이곤. “성서를 통해서 본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 기독교사상 1989. 9.
김영환. 바르트에서 몰트만까지 “현대 독일신학의 종교개혁신학적 조명” 대한기독교서회 1982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