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분단과한국전쟁] 정전협정의 체결과 전쟁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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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과한국전쟁] 정전협정의 체결과 전쟁의 유산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한국전쟁을 일으킨 양측 입장의 차이가 커서 별다른 진전이 이루어지지 않던 중에 저우언라이의 포로인도문제에 관한 새로운 제안에 의해 정전회담은 재개되었다. 그로서 양측은 어느 정도의 협의점을 찾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용하게 된다. 먼저 트루먼의 뒤를 이어 집권한 군인 출신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정전 협정 장기화를 반대하였고 또한 공산 측에 대한 압력의 일환으로 국가 안전 보장 회의에서 원폭 사용을 논의하였기 때문에 중국측은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인 점이 첫 번째이다. 또한 공산 진영 내부에서 스탈린의 사망 이후 그 후계자인 말렌코프의 정전 주장 및 중국의 국공 내전에 이은 한국전쟁 참전으로 따른 내적인 문제, 생전 스탈린과 김일성의 정전을 희망하는 입장의 변화도 한 가지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정전회담이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시작한 53년 4월부터 이대통령은 정전 반대 움직임을 활발히 전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전 조건은 중공군의 철수, 북한군의 무장해제, 한미방위조약의 조인 등이었다. 이에 대해서 처음에 아이젠하워는 거부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미국의 이승만 정권의 쿠데타 방안을 논의했다. 한편 정전회담이 재개된 첫날 공산 측 대표 남일은 6개항을 제안했다. 4월 30일 이대통령은 클라크에게 서한을 보내 새로운 조건 6가지를 내놓았다. 이러한 주장은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한편 5월 7일 남일은 8개 항목을 새롭게 제안해서 내놓았지만, 미국이 거절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중국의 제안으로 기초로 해서 다시 다른 안을 제안하였지만 중조 측이 받아들일 수 없었고, 5월 25일 미국은 새로운 제안을 하고 이 제안은 미국 측의 양보로서 중국 측으로서는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다. 반대로 이승만 정부에는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