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

 1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
 2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2
 3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3
 4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4
 5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5
 6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6
 7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7
 8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8
 9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9
 10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0
 11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1
 12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2
 13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3
 14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4
 15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5
 16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16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시가작품] 정과정(鄭瓜亭)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 목 차 ☺

Ⅰ. 서론

Ⅱ. 본론

1. 의 소개
2. 의 어석 연구
3. 의 어조
4. 의 명칭
5. 의 역사적 배경
6. 의 형식

Ⅲ. 결론

Ⅳ. 참고 자료 및 참고 문헌

본문내용
5. 의 역사적 배경

1) 작자와 창작 배경
은 다른 고려가요와는 달리 작자가 명백하게 밝혀져 있는 노래 현전하는 고려가요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작자가 밝혀진 우리말 시가로는 정과정이 유일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며,『고려사』 정과정은 內侍郎中 정서(鄭敍)가 지은 것이다. 敍는 瓜亭이라 自號했고, 外戚과 혼인을 맺어 仁宗의 총애를 받았다. 毅宗이 즉위하자 그의 고향인 東萊로 돌려보내면서 이르기를「오늘 가게 된 것은 朝廷의 의논에 몰려서이다.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 정서는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었으나, 소환명령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거문고를 잡고 이 노래를 불렀는데, 가사가 극히 悽婉하다. 이제현(李齊賢) 이 시를 지어 이 노래의 뜻을 풀이하였다. “임 생각에 옷을 적시지 않은 적이 없으니, 봄 산의 뻐꾹새와도 같다. 옳고 그른 것은 사람들이여 묻지 마라. 이지러진 달과 새벽 별만은 알고 있을 것이다.”
에는 다른 문헌에 비해 비교적 작가인 정서나 에 대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다른 기록들에서도 정과정의 작가를 정서로 밝혀 놓고 있으며, 학계에서도 정과정을 정서의 개인 작품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정무룡,『정과정』, 경성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8 재인용 : 정과정이 공동작이라고 보는 견해에서는 제 4행까지를 정서의 창작으로 보고 나머지는 후대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추가된 것으로 보는데 그들 역시 정과정을 지은 주체가 정서라는 데에는 공감한다.

이 작품의 작자 정서(鄭敍) 는 호가 과정(瓜亭) 이다. 그는 상국공(相國公) 의 사위이자 그의 처형은 인종의 비(妃) 공예태후(恭睿太后) 이며 따라서 정서는 인종과 동서간이며, 의종 ․ 명종 ․ 신종 등의 이모부가 된다. 최철,『고려 국어가요의 해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 pp. 175-186
그러나 그는 의종 5년에 대령후(大寧侯) 와 사귀어 그 집에서 놀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아 그 해 5월 25일에 동래로 귀양 가게 되었다. 그 뒤 그는 몇 차례의 사면 의종 8년 4월에 사를 내린 이후 10년 4월과 8월, 18년 4월, 22년 4월, 23년 4월에 걸쳐 크고 작은 특사와 석방의 조치가 있었다.
에도 풀려나지 못하다가 의종 25년 8월에 정중부(鄭仲夫) 의 쿠데타에 의하여 의종이 밀려나고, 명종 1년 10월에 대사령(大赦令) 이 내려지고 나서야 20여 년간의 귀양살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처럼 명문가 출신이자 왕실의 외척이며, 의종의 이모부였던 정서가 20여 년간이나 귀양살이를 해야만 했던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인종은 5남 4녀를 두었는데 그 중 장자인 의종이 태자가 되는 것은 당연했으나 차자인 대령후가 덕망이 있고 도량이 넓어 인종과 왕비는 그를 태자로 삼으려 하였다. 그러나 태자시강으로 있던 정습명이 극간하여 의종이 보위에 오르게 되었고, 이 때문에 형제간에 시기가 많았다고 한다. 의종에게 아우인 대령후의 존재는 매우 불만스럽고 거추장스러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마침 정서가 대령후와 가까이 지내는 것을 보고 조정 논의를 핑계 삼아 그를 귀양 보낸 것이다. 정재호,「 에 대하여」,『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7, p.183.
따라서 “머지않아 소환하게 될 것이다.” 던 의종의 언질은 이모부인 정서의 서운함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궁색스런 빈말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의종이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려고 했거나 과연 정서를 구하려는 의지가 있었고 공예 태후의 존재를 염두해 두었다면, 2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귀양을 보낼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최철, 앞의 책.

요컨대 정서는 대령후와의 관계 때문에 희생된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으며, 그의 노래에서 “過도 허물도 千萬 없소이다” 라고 변명하며 억울해하고 있다. 정서의 입장에서는 모반을 꾀한 일도 없으니 당연한 말이나, 당시의 정국을 그가 너무 쉽게 생각하여 사려 없이 순진하게 대한 데에도 원인이 있고 보다 근원적으로 “성질이 경박하고 재예(才藝) 가 있었다” 는 진중치 못한 그의 인물 됨됨이에 원인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정서가 순전히 정치적 희생물이 된 것은 사실이나 속사정을 살펴보면 유배 원인을 의종과 추종 세력의 참언에만 돌릴 수 없는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이다. 박노준,『고려가요의 연구』, 새문사, 1995, p. 352


2) 창작 시기와 장소
문헌 기록상으로는 정서가 동래로 유배당하여 노래를 지었다고 간단히 언급하고 있을 뿐 그
참고문헌
Ⅳ. 참고 자료 및 참고 문헌

☞ 권영철, 「정과정가 신연구」,『연구논문집』,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 1968
☞ 김명준,『고려속요집성』, 도서출판 다운샘, 1993
☞ 김명준,「「鄭瓜亭」과 鄕歌의 距離」,『우리 文學硏究』제14집, 우리문학회, 2001
☞ 김쾌덕, 『고려속가의 연구』, 국학자료원, 2006
☞ 박노준,『고려가요의 연구』, 새문사, 1995
☞ 박병채,『새로고친 고려가요의 어석연구』, 국학자료원, 1994
☞ 이승명,『정과정의 종합적 새 연구』, 이회, 2003
☞ 장덕순,『한국문학사』, 동화출판사, 1980
☞ 정무룡,『정과정』,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 정무룡,「의 原狀的 形式 試考」, 경성대학교 논문집, 1996
☞ 정병욱,『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2
☞ 정병욱,『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82
☞ 정재호,「에 대하여」,『고려시대의 가요문학』, 새문사, 1987
☞ 조동일,『한국문학통사 1』, 지식산업사, 1990
☞ 조윤제,『한국문학사』, 탐구당, 1987.
☞ 최용수,『고려가요연구』, 계명문화사, 1993
☞ 최철,『고려 국어가요의 해석』,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