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시가론 -김천택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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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전시가론 -김천택 시조에 대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김천택 생애



3. 김천택 시조-중인의 삶과 정서

3.1 애정과 연정의 시조

3.2 안빈낙도의 시조

3.3 한탄의 시조


4.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김천택이 생존했던 기간은 숙종조에서 영조조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황폐화되었던 문화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던 시기이다. 양란은 조선후기 사회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쳐 신분체제의 동요,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 실학사상의 대두 등 중세 질서의 해체와 근대로의 지향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정치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바탕으로 하여 문화 활동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사대부에 억눌리어 기를 펴지 못하던 서민 계급들이 자아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문화 활동이 점차 활기를 띠게 되어 평민 작가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한문학 위주의 문학에서 한글을 사용한 문학으로의 변화가 초래되었다. 즉 시조 문학에서도 한문 고어 투에서 벗어나 국문으로 시조 창작이 시도되었다.
김천택이 작품 활동을 전개하였던 조선후기에는 실학사상이 지배하던 때였다. 이 당시에 나온 작품들은 양반들의 공리공론, 허위의식에 비판을 가하며 현실사회의 문제를 해학적이고 풍자적으로 다룬 내용의 문학작품이 많았다. 이런 시기에 김천택의 시가관은 오히려 사대부지향의식을 담고 있었는데 그의 사상은 주로 강호한정 등의 유교사상과 체념, 도피, 은둔에서 느낄 수 있는 도교사상이 주된 사상적 기반이 되어 작품에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작가 활동에 있어서 사대부 작가보다 가객을 중심으로 한 평민 작가들이 주축이 되어 활발히 활동하였으므로, 그 결과 가단이 형성되고, 가객들이 이에 모여 시조 창작과 가집 편찬 활동을 하게 되었다. 김천택이 편찬한 가집으로 ≪청구영언≫은 ≪해동가요≫·≪가곡원류≫와 함께 3대 시조집의 하나이다. 책명은 한글로 모두가 ‘청구영언’이지만, 한자로 쓰면, ‘靑丘詠言’, ‘靑邱永言’, ‘靑丘咏言’ 등으로 표기된다. 김천택은 우리의 노래가 구전으로만 읊어지다가 없어짐을 한탄하여, 기록으로써 후세에 전하고자 이 책을 편찬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최초의 가집이라고 평가 받는 ≪청구영언≫의 편찬, 가단 활동의 선구적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큰 김천택의 시조에 대해 중인의 삶과 정서의 측면에서 연구해 보고자 한다.


2. 생애
김천택의 생몰 연대를 알만한 자료는 지금까지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 후기의 시조작가·가객으로 지냈고, 자는 백함(伯涵) 또는 이숙(履叔), 호는 남파(南坡)이며, 1680년대 말에 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는 ≪고금창가제씨 古今唱歌諸氏≫의 명렬순(名列順)으로 보아 김수장(金壽長)보다 몇 살 연장자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김수장의 출생년이 1690년(숙종 16)이므로, 김천택의 출생년은 1680년대 말이라고 보아도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김천택의 가계와 신분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김천택의 신분에 관해 ≪해동가요≫의 작가제씨(作歌諸氏)에는 숙종 때의 포교(捕校)라 소개되어 있다. 당시 가객들의 신분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중인계층으로서 관직생활은 젊었을 때 잠시 지냈고, 거의 평생을 여항에서 가인·가객으로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청구영언≫에서 자신의 시조를 ‘여항육인(閭巷六人)’이라는 항목에 넣은 것을 보더라도 이를 짐작할 수가 있다.
정윤경(鄭潤卿)이 ≪청구영언≫ 서문에서 “성률(聲律)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문예에도 밝다.”라고 평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당시의 일반 가객들보다는 인격이나 지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었다고 추측된다.
시조작품은 진본(珍本) ≪청구영언≫에 30수, 주씨본(周氏本) ≪해동가요≫에 57수가 수록되어 있는데, 중복되는 것을 제외하면 73수가 된다. 박씨본(朴氏本) ≪해동가요≫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를 모두 합하면 약 80수가 되므로, 당시의 가객으로서는 김수장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남긴 셈이다. 장시조는 하나도 없으며 모두가 단시조 작품이다. 내용은 강호산수를 읊은 것이 가장 많고, 교훈적인 것, 체념과 탄세적(歎世的)인 것이 많아서 사대부 시조의 경향을 답습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1728년(영조 4)에 편찬한 ≪청구영언≫은 당시뿐만 아니라 후대에까지 가악의 발달과 가집의 편찬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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