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박물관역사] 제6장 박물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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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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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8세기에 미술품 수집이 놀랍게 성장한 것은 경제적인 번영과 그것이 촉발한 사회적인 변화의 직접적인 결과였다. 옛날 귀족이 그들의 부의 바탕을 토지의 이용에 둔데 반해서, 사회의 새로운 계급은 상업의 갑작스러운 팽창과 산업의 완만한 발흥으로 인해서 그들의 영향력을 얻게 되었다. 산업은 법인 회사의 형성을 통해서 자본을 보다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고, 또 노동을 보다 더 합리적으로 조직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돈 장사, 다시 말하면 은행업이 막대한 부를 빨리 축적할 수 있는 가장 창의력이 있는 분야였다. 부르주아들이 이러한 이점 때문에 이득을 많이 보았다. 귀족에게 상업적인 활동을 금지하고 있던 프랑스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하지만 이러한 금기가 영국에서는 그렇게 엄격하게 준수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북유럽은 이러한 사회, 경제적 혁명에 마지막으로 항복한 나라들이어서 18세기 내내 이들 나라에서의 미술품 수집은 옛날과 마찬가지로 군주들의 사업으로 남아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부의 증가와 부의 보다 광범위한 분배 때문에 “소비자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해서, 그 결과 증가된 수요와 공공연한 투기로 인해 18세기 전체를 통해서 예술품의 값이 상승되었다. 이 투기는 또한 경제의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쳤다.
경매의 유행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옛날에도 대단했다. 암스텔담이 중요한 지위를 유지했으나 점점 도전을 받기 시작해서 18세기 후반에는 파리에 그 지위를 잃게 되었다. 17세기에 프랑스에서는 길드 조합원들이 제작하는 것과 종류가 유사한 물건을 가진 다양한 길드 조합이 경매를 마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