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에서 바라 본 세종시대 사실 을 사실 로 기록하고자한 세종 고려사의 정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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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에서 바라 본 세종시대 사실 을 사실 로 기록하고자한 세종 고려사의 정리를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史學에서 바라 본 세종시대
■ 사실(史實)을 사실(事實)로
기록하고자한 세종
- 『고려사』의 정리를 중심으로
왜 『고려사』의 정리 인가?
사실 처음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의 세종시대를 다루라는 주제를 접했을 때 얼마간의 고민거리가 되었음이 사실이다. 세종실록이라는 1차사료를 통해 세종시대를 구현해 내고 역사적 의의를 찾아 평가하는 이 수업의 전반적 기조가 사학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수업을 통해 1차 사료를 기초로 논지를 세워 나가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사학적인 방법의 새로운 접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사학도로서 세종의 역사관을 살펴봄이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세종 시대에 많은 역사적 저술의 편찬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고려사 개수 대목이었다. 세종1년(1419)에 고려사 개수에 대한 첫 명령이 있었고 이것의 인쇄가 이루어진 것은 세종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인 단종 즉위년 (1452)이었기 때문이다. 실로 오랜 기간 동안의 집요한 편찬 작업이었다. 또한 역성혁명의 기치를 세운 조선왕조로서 망해야 마땅했을 고려에 대한 역사편찬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가 동하게 하는 것이었다.
고려필망론(高麗必亡論)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다. 따라서 역사는 때로 패자에게 아무런 발언의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승자의 발언으로 일관되게 기술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향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데, 한 예로 저 유명한 천명사상을 이끌어낸 은주혁명을 들 수 있다. 동양에서의 혁명이란 하늘로부터 부여된 명을 바꾼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늘은 부덕한 자를 버리고 덕이 있는 자를 세우게 된다. 혁명의 주인공들은 이와 같은 이론에 부합하고자 자신들의 혁명을 정당화 하는 과정을 거치는 데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 군주의 도덕적 대비 일 것이다. 은의 주왕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에 의해 더할 나위 없는 폭군으로 기록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고고학적 기록은 이와 다른 사실을 보여주는데 갑골문의 기록에 따르면 은의 왕권은 주왕(紂王) 때가 가장 강성하였다고 한다. 또한 국가적 체계도 이 때 가장 잘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주왕의 폭정 내지 악정에 관한 내용은 더욱 찾아 볼 수 없다. 이평수, 동양의 역사와 문명 강의안, 제 3강 西周와 春秋戰國時代
수양제를 대단한 패륜, 폭군으로 기록한 주체 역시 형제를 살해한 이세민에 의해 창건된 당(唐)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면 수양제에 대한 일관된 평가 역시 재고의 여지가 남는 것이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 이었다. 고려사란 태조 이성계의 명에 따라 정도전, 정총 윤소종 등이 1392년부터 4년여에 걸쳐 편찬한 고려국사를 말한다. 여기서 춘추관 동지사 윤소종은 바로 윤회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이 책은 역성혁명을 일으킨 태조의 입장을 반영해 고려필망론(高麗必亡論)에 입각해 있었다. 이한우,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해냄출판사,2006.p255
고려는 시조가 건국함으로부터 지금까지 거의 5백년이 되었는데 공민왕에 이르러 아들이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그때에 권신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특별한 은총을 견고히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요망스런 중 신돈의 아들 禑를 공민왕의 후사라 칭해 왕위를 도둑질 한직 15년이 되었으니, 왕 씨의 제사는 이미 폐해졌던 것입니다. 禑가 곧 포학한 짓을 행하고 죄 없는 사람을 살육하며...후략... 국역 조선왕조실록 사이트
(태조 01 원년/07/17 丙申)
이처럼 태조의 즉위를 다룬 태조실록의 내용은 그야말로 태조 이성계를 높이기 위한 기록이었으므로 최대피해자는 偶와 昌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고려사에는 偶昌王 때가 고려의 정통이 아니라고 보고 거짓 조정 즉, 위조(僞朝)라 하여 기술되어 있지 않았다. 홍이섭,『세종대왕』,세종대왕기념사업회,1993.p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