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1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1
 2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2
 3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3
 4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4
 5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5
 6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6
 7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7
 8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8
 9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9
 10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10
※ 미리보기 이미지는 최대 20페이지까지만 지원합니다.
  • 분야
  • 등록일
  • 페이지/형식
  • 구매가격
  • 적립금
자료 다운로드  네이버 로그인
소개글
마가복음과 공관서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로마의 시민, 바울의 로마 시민권
(사도행전을 중심으로)
Ⅰ. 로마시민, 시민권
시민이란 국정 참여권을 갖고 국방의 의무를 지는 존재이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둘 다 고대에 번영한 문명이고 국가체제가 도시국가라는 점에서도 비슷하지만, 시민이나 시민권에 대한 사고방식은 정반대라 해도 좋을 만큼 달랐다. 그리스에는 많은 도시국가가 병립해 있었기 때문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유명한 아테네를 예로 들면, 아테네인들은 아테네 영토 안에서 둘 다 아테네 태생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사람만 아테네 ‘시민’으로 생각했다.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쌓아올린 대정치가 페리클레스도 고대 아테네의 정치가 ·군인. 평의회 ·민중재판소 ·민회에 실권을 가지도록 하는 법안을 제출해 민주정치의 기초를 마련했다. 외교상으로는 강국과는 평화를 유지했고 델로스동맹의 지배를 강화했다. 페리클레스의 시대는 아테네의 최성기였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두 번째 배우자가 밀레토스 태생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태어난 아들은 아테네 시민이 될 수 없었지만, 그때까지 페리클레스가 세운 업적에 보답한다는 이유로 특별대우를 받아서 겨우 시민권을 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시오노 나나미(2000),『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김석희 옮김(서울 : 한길사), pp.119-120.
1) 오랜 적도 일단 무찌른 뒤에는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스파르타인도 아테네인도 전쟁터에서는 그렇게 강했는데도 단기간의 번영밖에 누리지 못했다. 그 주요 원인은 과거의 적을 자국시민과 동화시키려 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이방인으로 따돌리는 방식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 전설에서는 로마의 초대 왕이라고 되어 있다.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딸인 레아 실비아가 마르스신(神)을 통해 낳은 쌍둥이 가운데 형이다. 동생 레무스와 함께 티베르강(현재의 테베레강)에 버려졌으나, 이리의 젖으로 자라다가 양치기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어 양육되었다. 그 후 동생과 협력하여 새로운 도시 로마를 건설하였으나(BC 753), 형제는 반목하여 도시의 신성한 경계를 넘었다는 이유로 동생 레무스를 죽였다고 한다. 또 이웃인 사비니인(人)과 싸웠으나, 화의가 성립된 후로는 로마인과 사비니인의 두 민족을 지배하면서 30년 이상 왕으로 재위하며, 인구증가 ·판도확대, 제도(원로원)의 확립 등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로물루스의 건국전설은 BC 3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는 현명하게도 그리스인과는 반대되는 방식을 선택했다. 오랜 적도 일단 무찌른 뒤에는 로마시민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는 계급이 구분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계급간의 유동성도 높았다. 평등을 대전제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계급간의 유동성이 높아진 것이다. 원로원 의원의 상당수가 해방노예의 자손이라고 할 정도였을 정도였다. 평민들의 권리를 지키는 호민관도 1년 임기를 마친 뒤에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었다. 노동조합 위원장이 퇴임한 뒤 이사회의 일원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공화정 시대에 계속 이어져 내려온 이 동화의 전통은 제정으로 바뀐 뒤에는 더욱 넓은 규모로 계승된다. 그리고 서기 212년에 카라칼라 황제가 제정한 법령, 로마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준다는 법령으로 이어진다. 시민 개념에서는 그리스인이 폐쇄적이고 로마인이 개방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2000),『로마인에게 묻는 20가지 질문』, 김석희 옮김(서울 : 한길사), pp.123-125
2) 이전의적에게도 시민권을 준 ‘로마의 지혜’
‘로마연합’의 제4요소는 라틴어로 ‘소키(socii)’ 에트루리아·움브리아·그리스인의 도시로서 로마와 조약을 맺어 자치가 허용되었으나 전시(戰時)에는 군대를 파견할 의무가 있었다. BC 2세기에는 복속화가 강화됨에 따라 자치권도 제한되었기 때문에 자주 로마시민의 권리를 요구하는 한편 로마를 모방하여 국제(國制)를 정비하여 라틴시민이 갖는 통상(通商)·통혼권(通婚權)이 주어졌다. 그러나 로마-라틴 시민과는 차별되고 권리도 계속 제한되었기 때문에 BC 90∼BC 89년에 동맹시 전쟁이 일어났다. 마리우스, 술라가 진압에 나섰으나 결국 무기를 버리는 시민에게 로마시민권을 주기로 하여 BC 87년에는 전(全)이탈리아에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그리스 여러 도시(都市)는 이탈리아 동맹시보다도 많은 자유가 부여되었으나 차차 로마의 강력한 지배를 받게 되었다. (출처 : 두산백과사전)
라는 동맹국이었다. 이곳에는 로마연합이 생긴 뒤에도 로마와 전투를 하였던 제국이 포함된다. 삼니움 족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에 걸쳐 살던 고대 이탈리아인의 한 파인 오스크어계(語系)에 속하는 민족. (출처 ; 위키백과)
이라든가 나폴리를 선두로 하는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은 모두 로마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소키’로서 연합에 가맹하게 된다. 그러나 군대의 발밑에 엎드린 소키에 대해 로마는 아주 너그러웠다. 이들 소키는 로마에서 완전한 자치가 허용되어 있었고, 로마는 그들에게 동화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통치형태, 문화, 종교 등 모든 것이 전과 똑같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스 건국에서 시작된 나폴리 등에서는 그리스어가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말하자면 패전국이 아니라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대우한다는 것이다.
다만 ‘로마연합’의 일원인 이상 조건은 있었다. 그것은 ‘만약 로마연합이 전쟁을 일으키면 동맹국으로서 병력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이 의무만 완수하면 ‘소키’는 로마에게 세금이나 공납금을 낼 필요가 없었다고 하니, 이 또한 관대한 조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소키’의 지배계급에 대해 로마시민권의 취득을 적극적으로 권한 것이다. 로마시민권을 취득하라는 것은 로마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로마의 국정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경우에 자국 시민권을 버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소위 이중국적이 되었지만, 로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 같은 로마의 조치가 얼마나 놀랄 만한 것인지는 현대세계로 바꿔 놓고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