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혁명의 독수리 로자 룩셈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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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혁명의 독수리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09.08.19 (水)
‘혁명의 독수리’,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 혹은 그녀의 이론이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바는 무엇일까? 1980년대 전, 그녀의 이미지는 부정적이었다. 그녀의 급진적인 사회주의 이론이 레닌주의나 스탈린 체제에 의해 왜곡, 무시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그녀의 이미지는 1960년대 초 ‘신좌파 운동’과 1980년 ‘비제도권’ 급진 운동에 의해 재평가받기 시작한다. 이러한 ‘재평가’ 움직임은 로자의 의견에 반(反)하던 국가사회주의의 몰락(구소련의 몰락)과 사회주의의 위기,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인한 위기 발생 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는 로자의 이론-급진적 민주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이 무너져가는 사회주의의 대안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로자의 생애와 개량주의-수정주의와의 투쟁, 급진적 민주주의의 옹호,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의 옹호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를 설명하고자 한다. 또 여성사적인 시점에서 접근한 만큼, 로자와 그의 연인 레오 요기헤스와의 관계도 이야기하고자 한다.
1. 로자 룩셈부르크의 생애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3월 5일 러시아령 폴란드의 남동쪽 자모슈치 지방에서 태어났다. 바르샤바 상인이었던 아버지 덕택에 그녀의 집안은 중산층 유대 가정에 속했고, 경제적으로도 유복한 가정에 속해 룩셈부르크가(家)의 자녀들은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족이 바르샤바로 이주한 후 그녀는 독일 부르주아적 전통의 영향과 동유럽 유대인의 코스모폴리터니즘 어원적으로는 그리스어의 kosmos(세계)와 polits(시민)의 합성어로, ‘세계시민주의(世界市民主義)’ 혹은 ‘세계주의’ 등으로 번역된다. 국가에 특유한 가치라든가 편견(偏見) 등을 부정하려고 하는 사상 또는 하나의 세계국가를 적극적 원리로 하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코즈모폴리터니즘은 국가주의를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인터내셔널리즘(internationalism, 국제주의)’과 공통이지만, 각 민족이나 국민국가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 대립되는 사상이다.
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했다.
로자는 어릴 때부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열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인간의 기원, 모권(母權)뿐만 아니라 현대 노동운동, 혁명사, 잉여가치론 등 어려운 주제를 다룬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또한 그녀는 열여덟에 유대 혁명 서클에 가입하여 반정부 활동에 참여했었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당시 폴란드의 정치·경제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폴란드는 산업 발달이 미약한 상태였으며 정치 지배는 절대주의적이고 전(前)자본주의 방법을 통한 억압과 탄압으로 일관되어 있었다.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공부하고자 했던 로자는 1889년, 스위스 취리히로 가게 된다.
스위스로 망명한 로자는 정치경제학과 법률학을 전공하며 정치를 직업으로 택하게 된다. 로자에게 있어 스위스 생활은 자신의 재능과 생각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녀는 1890년 자신의 지도자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레오 요기헤스를 만나 사랑하고, 1893년 요기헤스와 함께 마르크스주의 노동당인 폴란드 사회민주당(SDKP)을 결성하게 된다. 또 그녀는 1894년 SDKP의 기관지인 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사회 문제를 알리고 개혁하기 위해 노력한다.
1897년 우수한 성적으로 정치경제학, 법률학 박사를 받은 그녀는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하기 위해 1898년 독일 베를린으로 가게 된다. 노동 운동 등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독일에서 활동하고자 했지만, 그녀는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독일 노동 현장에 뛰어들 수 없었다. 추방되지 않고 노동 운동을 하기 위해 로자는 구스타프 뤼베크라는 독일 시민권자와 위장결혼을 해 독일 시민이 된다. 독일 시민이 되던 그 해, 로자는 논리적이고 명쾌한 글솜씨를 인정받아 의 주간이 되었으며, 10월에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열린 독일 사회민주당(SPD) 전당 대회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로자의 입장을 급진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이 독일에서도 유효하다고 주장한 그녀는, 사회민주당의 과격파로 급상승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지지를 얻기 시작하던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대중혁명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대중혁명으로 인해 로자는 여러 번 징역살이를 살거나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된다. 독일 사회민주당이 개량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면서, 로자는 그의 동료인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 공산당의 전신인 스파르타쿠스단 스파르타쿠스 활동은 1914년부터 암암리에 시작되었으나, 1916년 1월부터 비합법 잡지 《스파르타쿠스브리펜(Spartakusbriefen)》을 발행하면서 스파르타쿠스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들은 계급투쟁의 전개, 반란에 의한 사회혁명 시도, 즉각적인 평화를 주장하며 비합법 운동을 전개했으나, 중산계급과 농민·노동조합 기타 대중조직의 지지를 받지 못하여 활동인원은 수천 명에 그쳤으며, 심한 탄압으로 많은 사람이 투옥되기도 했다.
1918년 가을부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독일혁명 이후 혼란을 틈타 독일사회민주당 좌파와 손을 잡고, 1919년 1월 1일 전당대회를 통해 독일공산당을 결성했다. 그러나 여전히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그해 1월 베를린에서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사건 때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는 경찰과 연계된 보수적 의용단에게 살해당했다. 독일공산당은 이후 부침을 계속하다가 1956년에 위헌 결정으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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