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삶 율곡 이이 삶 율곡 이이 사상 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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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은 조선의 대 유학자로 교육가이자, 정치 사상가이다. 그는 관계에는 오래 머물지 않고, 고향에서 일생을 오로지 학문에만 바치며, 도산서원을 통한 실천적 교육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문집에는 「퇴계집」이 있다. 또 그의 저서 「성학십도(聖學十圖)」는 그의 교육 사상을 엿보는데 중요한 저서이다.
이이도 역시 조선의 대 성리학자로 교육가이자, 경세 사상가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여러 번의 과거시험에 줄곧 장원으로 합격하여, 대사헌, 대제학 및 몇 번의 판서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또한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학문과 후진교육, 사회교화에 노력하였다. 그는 십만양병설과 같은 과감하고 결단력있는 정책을 제시하는 정치가이자, 은병정사(隱屛精舍), 파주에 자운서원(紫雲書院)등 많은 서원을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퇴계 이황, 그의 삶 -
퇴계의 성은 이, 이름은 황, 자는 경호, 호는 퇴계, 도옹 등이며, 관향은 진보(眞寶)이다.
이황 선생의 출생에서 33세 때까지는 유교경전을 연구하는데 몰두하였다. 17세 이전까지는 이웃의 노인이나 숙부에게서 학문을 배웠으며, 17세 이후부터 스승 없이 대부분을 혼자 공부하였다. 그 때문에 퇴계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고 자기 힘으로 연구하게 되었고, 옛 성현의 글이라도 의심을 가지고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학문 방법을 개척하게 되었다.
퇴계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대체로 순탄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 동안에도 끊임없이 학문증진에 몰두하였던 그는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 이후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
그가 물러나기를 결심한 것은 당시 외척들이 권력을 독점하여 어지러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벼슬에 나가 한 시대를 바로 잡는 일 보다 학문 연구와 교육을 통해 인간의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밝혀 후세를 위해 참다운 표준을 제시하는 데 그 자신의 역할이 자각하였기 때문이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끊임없이 사퇴하려는 퇴계의 뜻과 놓아주지 않으려는 임금의 뜻이 항상 교차하여 문서상의 임명과 사퇴가 계속된 것이 노년기의 특징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건강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소망이 벼슬에 있지 않고 학문에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