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육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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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어거스틴의 기독교 교육론
우리가 개혁주의 사상이라는 수업을 들을 때 개혁주의란 신약에 나타난 바울의 신학을 어거스틴이 정리하고 칼빈에 이르러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작업을 걸친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어거스틴과 칼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분하기 전에 같은 맥락을 지닌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살펴보게 되면 제1권의 1장에서 10장 까지 내용들을 살펴보는데 칼빈은 먼저 하나님을 아는 신의식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특히 1장 챕터 2에서는 한편 인간은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 다음에 그분에 대해 묵상하며 자기 자신을 검토5하지 않는다면, 자기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일이다.6 왜냐하면 우리들은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우리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과 불순함 등을 확신하게 되지 않는다면, 항상 스스로에게 의롭고 정직하고 현명하고 신성한 것처럼 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은 우리들 모두에게 생래적(生來的)인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바라보고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한,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나면서부터 위선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으므로7 참된 의(義) 자체를 대신하는 의의 어떠한 텅 빈 외관일지라도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나 우리 주위에 있는 것들 가운데 극히 부도덕한 죄에 물들지 않은 것같이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정신을 인간 부패의 범위에 제한시키는 한 조금이라도 덜 더러운 것은 마치 그것이 가장 순결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검은 물체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눈에는 희끄무레한 색이나 거무스레한 색마저도 아주 흰색으로 보이는 것과 같다. 사실 영혼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어느 정도까지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으로 훨씬 더 명백하게 구별할 수가 있다. 만일 우리가 대낮에 땅 위를 내려다 보거나 혹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사물들을 둘러본다면, 우리 자신이 아주 강하고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태양을 올려다보고 이를 똑바로 응시한다면, 땅을 볼 때 그렇게 좋았던 시력은 태양 광채 때문에 즉각 무뎌지고 혼미해지고, 따라서 지상의 사물들을 바라볼 때의 예리한 시력도 태양을 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영적 은사들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가 우리의 의(義), 지혜, 덕에 아주 만족하면서 이 세상의 너머를 바라보지 않는 한, 우리는 스스로를 극단적으로 추켜올려서 자신을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생각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하며,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그분의 의와 지혜와 능력이 얼마나 완전한가를 생각하기를 시작한다면,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 안에서 즐거워하던 것이 곧 가장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변할 것이다. 또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그렇게 감동시켰던 것이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써 역겨워질 것이다. 능력의 얼굴을 하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능력자임이 입증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것 자체처럼 보이는 것들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구역질나는 것이다. 라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서술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합함과 그안에서 교재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가는 것을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하여 역설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즐거움에 대하여 기독교 강요의 전반에 걸쳐서 서술하고 있는 칼빈과 우리가 즐겨야 할 유일한 대상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우리 자신은 즐겨야 하는 대상이 아니고 하나님이 즐기시는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어거스틴은 말해주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용하시는데 다른 것이 아닌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신다. 즐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며 이용의 대상은 행복하게 되려는 우리의 노력을 도우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우리가 얻으며 거기에 안주하게 한다.
어떤 사물을 즐긴다는 것은 그것 자체 때문에 그것에 안주하는 것인데 이와 반대로 이용한다는 것은 합당한 것을 얻기 위해서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것을 사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즐김의 진정한 대상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며 성부, 정자, 성령은 각각 완전한 실재이면서 동시에 모두 한 실재이다.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으며, 성자 안에 동등성이 있으며, 성령 안에 단일성과 동등성의 조화가 있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속성은 성부 때문에 모두 하나이며, 성자 때문에 모두 동등하며, 성령 때문에 모두 조화를 이루었다.
신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신을 살아있는 존재라고 하므로, 신을 생명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신에 합당하고 어리석지 않은 개념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지혜이시므로 모든 다른 것보다 더 존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므로 변함없이 살아계신 진리를 충분히 즐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며 창조주 하나님은 진리 안에서 그 피조물을 염려해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보려면 우리의 영혼을 청결히 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청결한 소원과 착한 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부활 승천에서 힘을 얻으며 그의 재림과 심판에서 자극을 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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