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도덕교육론 -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으로서 덕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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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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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으로서 덕 고찰
Ⅰ. 들어가며
현재 우리사회에서는 무절제한 생활 태도 때문에 많은 문제가 만연해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인터넷과 게임에 중독 되어 있다는 점이나, 신용 불량자들이 점점 더 증가해가고 있다는 것 등등이 사회적 혼란을 야기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해던 절제와 중용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 글을 통해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했던 것들 중 절제와 중용에 조명을 두고 구체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Ⅱ.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 개관
( 1 ) 중용으로서의 덕
감정은 매우 넓은 행동의 영역을 갖기 때문에, 인간은 과다와 과소의 조화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적절한 중용을 발견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설하였다. 덕은 우리의 다양한 감정들과 행동들에 관련되는데, 왜냐하면 그 감정들 속에 과다함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은 공포, 자만, 색욕, 갈망, 연민, 쾌락, 고통과 같은 감정을 너무 많이 혹은 너무 적게 느낄 수 있으며 이 두 경우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들을 느껴야 할 때 우리는 중용을 취해야 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밝혔다. 이는 인간에게 있어 최상의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는 곧 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따라서 악덕은 과다나 과소의 극단이며 덕은 그것의 중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정들이 통제되고 행동들이 인도되는 것은 영혼의 이성적인 힘을 통해서이다. 예를 들면 “용기”의 덕은 두 가지의 악덕, 즉 공포(과소)와 만용(과다)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덕의 상태는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을 실행하는 상태이며, 상대적인 중용에 머무는 상태이고 이성에 의해 결정되는 상태이며, 실천적이며 지혜로운 인간이 결정하는 상태이다.”
중용은 만인에게 동일하지도 않으며 모든 행동에 대한 하나의 중용도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중용은 상황의 변화에 따라 각각의 인간에게 상대적이다. 식상의 경우에 있어 성인 운동가와 어린 소녀에게 알맞은 식사량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 양자에 있어서도 적절한 중용이 존재하는바, 그것은 “절제”이다. 여기서 양극단, 즉 포식(과다)와 절식(과소)은 악덕을 의미한다. 이와 유사하게 돈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낭비와 인색의 중용으로서 “관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양이 아니라 사용자의 재산에 따라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이 어떤 행위에는 전혀 중용이 없을 수도 있다. 즉 그 행위들 자체가 악의, 질투, 간통, 절도, 살인과 같이 사악함을 이미 그 본성 속에 내포하고 있는 경우에는 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본질적으로 악하며 과다와 과소를 막론하고 그러한 행동들을 한다는 것은 항상 잘못된 것이다.
( 2 ) 중용의 덕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항상 중용을 발견하고 그래서 덕이 있는 인간이 되는 조건으로 다음과 같은 네 가지를 들고 있다. 첫 번째는 실천적 판단력을 바탕으로 하여 감정과 욕구의 본질을 잘 파악하고 그래서 올바른 실천적 지식에 도달하고 이를 바탕으로 행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전혀 의식하지 못한 어떤 행위가 우연히 중용에 들어맞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중용의 덕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실천적 판단력으로 바탕으로 한 양식을 키워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라고도 했다. 두 번째의 조건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일반적인 성향인 극단으로부터 피하려는 노력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각자의 개인적인 성향을 잘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에 따라 커다란 성향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므로 자신의 성향을 파악한 후 중용의 덕을 이에 맞추어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 네 번째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중용의 덕을 습관화시키는 일이다. 어쩌다 한번 중용에 들어맞는 행위를 하였다고 그 사람이 곧 덕을 지닌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항상 중용을 선택하도록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천적 판단력은 추상적 암기를 한다고 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일반적인 법칙을 구체적인 사례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통해서 정차 나야져야 한다. 결국 우리가 올바른 길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서 삶을 되묻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 3 ) 심사숙고와 선택
이 심사숙고와 선택은 ( 2 )번에 연장선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이성적 영혼에는 두 종류의 이성적 기능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론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확고한 원리나 철학적 지혜를 제공해 준다. 다른 하나는 실천적인 것으로서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이루어지는 우리의 행동에 대해 이성적인 지침이 된다. 이는 위에 ( 2 )번 첫 번째에서 설명한 실천적 지혜이다. 이성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는, 만일 이 이성적 요소가 없다면 인간은 결코 어떠한 이성적인 능력도 소유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강조하였다. 즉 비록 인간은 “올바른” 행동을 위한 생득적인 능력(가능성)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자연적으로” 올바르게 행위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무한한 수의 가능성과 흡사하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각하였다. 선이란 인간 내부의 “가능태”이다. 그러나 도토리가 거의 기계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도토리나무로 되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것을 그것의 현실의 형태로 계발해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가 행할 바를 알아야 하고 그것에 관해 심사숙고해야 하며 그것을 행할 수 있도록 선택해야 한다. 선을 아는 것만으로도 선을 행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식 이외에도 심사숙고에 의한 선택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도덕적 행위의 기원-그것의 목적인이 아니라 작용인은 선택이며, 선택의 기원은 갈망과 목적에 대한 견해를 가진 이성적 추리이다.” 이성이 없다면 “선택”도 없다. 따라서 “지성 그 자체는 아무것도 움직이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목적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지성만이 어떤 것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전혀 부당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