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1910년대의 민족 독립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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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문과학 1910년대의 민족 독립 운동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 1910년대의 민족 독립 운동 ♤
- 목차 -
Ⅰ. 머리말
Ⅱ. 국내에서의 민족독립운동
Ⅲ. 국외에서의 민족독립운동
Ⅳ. 맺음말
Ⅰ. 머리말
일제는 1911년 소위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新民會를 해산시키고 계속해서 민족지도자들을 체포ㆍ감금하였으며, 헌병경찰제도를 주축으로한 무단통치를 실시함으로써 모든 집회ㆍ결사를 금지시키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전개되었던 의병투쟁이 대타격을 받았으며 민족지도자들이 투옥 감금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음성화되어 비밀 지하운동의 성격을 띄어갔다.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간도ㆍ연해주 등지에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민족의 독립역량을 축적해 나갔으며, 미주지역에서도 독립을 위한 다방면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Ⅱ. 국내에서의 민족독립운동
무장독립전쟁의 성격을 띤 의병운동은 1910년 합방 후에도 전국적으로 활동이 계속되었다. 식민지하에서 의병을 조직적으로 재정비하여 총독부를 축출하려는 유림들의 의병계획이 이루어 졌다. 그 중에서도 1912년 林炳瓚이 주도한 독립의군부는 대한제국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복벽주의를 내세운 대표적 단체였다. 독립의군부를 결성한 임병찬의 계획은 光武皇帝의 密詔에서 비롯되었다. 임병찬은 “正二品 資憲大夫 獨立義軍府 陸軍副將 全羅南北道 巡撫總將”의 명을 받아 전국 8도에 도 대표를 두고 전라도에는 각 군 대표까지 선임하였다. 독립의군부는 전국 각 군 조직을 마치고 조선총독부에 대하여 일시에 축출 각서를 보내고, 일본정부와 외국정부에도 항의각서를 송달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는 계획이었으며 동시에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1914년 5월 발각됨으로써 의군부의 조직은 봉쇄당했으니 의병을 일으키기 전에 유림의 세력은 크게 타격을 받았다. 독립의군부의 조직 파괴는 복벽주의 세력이 붕괴하게 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儒林으로 주목받은 많은 인사가 유배당했고, 임병찬도 거문도 유배 중에 1916년 5월 23일 순국하였다. 독립의군부는 비록 그 계획이 실현되기 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끝났으나 독립운동사상 큰 의의를 남겼다.
1910년대의 비밀결사 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던 단체가 대한광복회였다. 한말 의병장 許蔿의 제자인 박상진이 주도하여 처음에는 경상도 이래에 조직되어 있었으나 1916년부터는 전국적 조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회원들은 양반출신과 평민출신이 함께 어울려 있었고, 직업도 다양하였다. 유창순한훈우재룡梁濟安 등 의병출신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박상진김좌진이관구 등 신교육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이렇게 조직된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의 모금과 친일파의 암살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각처의 거점에 잡화상이나 미곡상, 아니면 여관을 설치하였고 무기도 수십 정 확보하였다. 광복회는 그에 필요한 군자금을 수합하였는데, 上東광산, 稷山광산, 慶州의 우편차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았고, 전국의 富豪명단을 작성하여 모금하기도 했고, 그에 응하지 않은 악성 부호를 처단하기도 했다. 악성 부호의 처단은 1917년과 1918년에 있었던 일이다. 처단 현장에는 선고장을 두었기 때문에 광복회의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그에 따라 일제의 수사도 강화되었다. 그러나 1918년 초 동회회원인 이종국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함으로써 광복회의 정체가 발각되어, 박상진을 비롯한 37명의 동지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경의 체포를 모면한 일부 회원은 만주로 망명하여 義俠鬪爭을 전개하였고, 국내에 남은 회원들은 韓焄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그 활동은 위축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광복회는 1919년 3.1운동 이후 재기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Ⅲ. 국외에서의 민족독립운동
1. 만주
만주는 1905년 乙巳勒約 이후 많은 民族運動者들이 건너 감으로써 우리 민족 항일운동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민족운동은 義兵활동과 더불어 구국교육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로 국망을 예견한 이상설이동녕이회영정순만여준 등의 민족운동가들은 1906년 4월경부터 북간도의 요지인 용정촌을 독립운동기지의 한 예정지로 잡고 민족주의 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이 서숙에서 중점을 둔 교육내용은 신학문교육과 함께 실시한 철두철미한 항일민족교육이었다. 따라서 이름은 서숙이지만 실상은 독립군 양성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 후 1908년 4월에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로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블라디보스톡으로 떠난 후에 그 지역에 일제의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그들의 감시와 방해 및 재정난 등 곤경이 닥쳐 스스로 문을 닫고 말았다. 북간도지방의 한인사회는 이와 같이 1906년 서전서숙의 개숙으로 국외독립운동기지화가 추진된 이래로 독립운동기지의 터전을 굳혀갔다. 이 뒤를 이어 1908년 김학연김묘연이 화룡현 태랍자 명동촌에 명동서숙을 설립하였는데 이 학교는 1910년 3월 명동중학교로 개편되어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부터 만주 일대의 한국인이 사는 곳이면 어디를 불문하고 학교가 설립되었는데 동간도 지방만하여도 50개교를 넘었다. 당시 학교의 설비는 초라한 것이었으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대단하였다. 학생들은 제복 제모에 각반을 감고 군대식 교련과 국가를 배웠으며 수신 시간은 비운의 조국 역사와 일제의 잔학한 침략사를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사용하는 교재도 교육방침과 목표에 알맞도록 만들어 썼다. 그 대표적인 것이 修身敎科書인 『吾讐不忘』이다. 이 책은 등사판으로 만들어졌는데 韓日合邦 이전에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연대순으로 열거한 후 대한제국시의 일본의 배신적이고 야만적인 침략행동을 기술하고 있으며 한일합병 이후의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폭로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