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임진왜란 전개 임진왜란 휴전 성립 임진왜란 강화 결렬 정유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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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서론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선조 대의 조선은 약 200년 동안 부분적인 외침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쟁을 치른 적이 없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 전역은 불시에 예상되는 전쟁에 대한 대비를 소홀히 했다. 당시 조선은 명종 대에 외척 세력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자행한 학정의 잔재들을 정리하고 붕당 정치의 기반을 닦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붕당정치는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세력 경쟁으로만 치닫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양반 계층은 붕당 정치에 대한 참여만을 모색하고 있었고, 국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이처럼 조정이 안일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본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새로 등장해 혼란기를 수습하고, 전국을 통일하여 봉건적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지방에는 제후 세력들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이 제후세력이 위협적 존재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그들의 힘을 축소시키고, 전국시대를 통해 획득한 전술적 능력을 외부로 표출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으려는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중국대륙 진출을 명분으로 한 조선 침략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에게 조선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정에 정통한 대마도주는 우선 조선과 교섭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에서 사신을 보내어 통신사를 보낼 것을 요구해 왔다. 조선은 그 내용이 오만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지 않다가, 몇 번의 요구 후에 황윤길과 김성일을 보내어 그들의 속셈을 살폈다.
그러나 두 사신의 보고는 상반되었다. 통신정사 황윤길은 왜국이 전쟁 준비에 한창이라고 하면서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고, 통신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의 인물됨이 보잘 것 없고 군사준비가 있음을 보지 못했기에 전쟁에 대비하는 것은 민심만 혼란스럽게 할뿐이라고 했다. 이러한 의견 대립은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치달았고, 결국 동인의 세력 우세로 전란에 대비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이 나게된다.
그러나 김성일의 주장과 달리 이듬해 4월 왜국은 대대적인 침략을 강행해왔으니, 이것이 임진왜란이다.
본론
1)임진왜란의 전개
도요토미 정권은 1591년부터 조선 침략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여 제후들의 군대를 재편성했다. 마침내 원정군을 편성하여 1592년 4월 13일 15만의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를 선봉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 조정에서 급파한 이일과 신립이 상주와 충주에서 전사하자 서울의 민심이 동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