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 숙명전환의 선물 두권의 책을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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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 숙명전환의 선물 두권의 책을 읽고나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창가학회와 재일한국인」 , 「숙명전환의 선물」 두권의 책을 읽고
종교는 언제나 인간의 취약한 부분에서 발현한다. 유대교는 분명 먼 옛날 척박한 광야의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존처로서 발현했을 것이고, 불교는 인간의 번민과 고난에서 발현했으며, 기독교는 폭압적 계급사회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던 인민의 의지처로서 출발했다. 신의 존재유무를 떠나서 종교는 인간에게 필요한 의지처로서 기능하기 위한 삶의 수단이기도 했다.
남묘호랑개교라는 특이한 이름의 종교는 어릴적부터 들어왔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는 그런 종교는 이단이니 입에도 담지 말라 하셨다. 이름이 특이해서인지 관심이 가기는 했지만, 어머니의 말씀도 있고 그닥 접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던지라, 그런 이름으로만 기억되는 종교의 하나로 뇌리속에 남아있었다.
창가학회, 그러니까 남묘호렌게쿄라는 일본불교로부터 파생된 종교를 구체적으로 알게 된 것은 이 책을 읽고 나서였다. 이 책을 읽어봄으로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좀 더 구체적으로 알게 되고 책을 읽은 이후의 느낌은, 남묘호렌게쿄라 불리는 창가학회도 인간의 취약점과 의존성에서 출발하고 도약했다는 것이다. 지배계급의 종교였던 일본불교가 인민의 불교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도 남묘호렌게쿄때문이었고, 패망이후 사람들의 힘들고 어려웠던 삶의 의지처로서 확고한 기둥이 되어주었던 것도 창가학회였다. 어쩌면 창가학회의 ‘전략’은 무척 정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창가학회와 재일조선인의 관계는 여기까지 설명이 되면 일단 어느정도 이해가 가능하다. 일본패망과 대한민국과 북조선 정부수립으로 국적이 허공에 뜬채로 버림받은 사람들 재일조선인들이 일본내에서도 억압과 차별을 겪어야 하는 시기에 재일조선인 일부가 만난 종교는 창가학회였다. 창가학회는 국적이나 민족에 의한 차별을 허용하지 않고 모두가 같은 사람들임을 강조하며 재일조선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신심을 강조한다. 불교의 나무아비타불에 해당하는 ‘남묘호렌게쿄’를 읖조리도록 하면서 신심을 쌓고 수양하면 모든 것이 잘 될것이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렇게 불문을 외우며 ‘성공’한 사람들이 곳곳에서 생겼다.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패망이후의 일본은 한국전쟁과 기술직약적 산업을 통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하였고 그 시기를 재일조선인 이후의 창가학회역사와 맥락을 같이한다. 경제의 발전은 인민의 먹고사는 일에 있어 도움을 주고 그것은 종교가 있는 사람들이라면 종교적 신심과 결합되며 종교적 열심이 사회적 노력과 긍정적 수긍의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창가학회가 헌금을 강요하거나 하나의 신을 강조하며 섬기기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지만, 창가학회의 확장은 근대일본의 이러한 경제성장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신심이라는 것. 개인적으로도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어머니가 평생을 고질적 질병으로 달고 사셨던 허리통증을 부흥회에 몇번 참석함으로 씻은듯이 나았던 경험을 보았던 바가 있다. 신심의 효험이라는 것.. 그것을 증명할 수 없이 그저 플라시보 효과의 의미로 해석할 수 밖에 없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분명한 긍정적 변화라 했을때, 창가학회사람들이 증언하는 그러한 잘됨과 신심도 그러한 선상에서 있지 않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개인의 신실한 의지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성취하게 하는 어떠한 심리적 힘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두 권의 책에서 창가학회와 그들의 증언자들은 대부분 창가학회를 긍정적으로 소개한다. 그들이 창가학회를 통해 긍정적으로 변화한 삶은 무척 소중해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회원들 중 소수만이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의 선별은 창가학회에서 이룬다음 면담자에게 소개했다는 점, 그리고 긍정적 소개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 적잖은 견제를 받고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면을 고려해본다면 두 책 내용을 매우 일반화시키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결국, 창가학회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기독교나 천주교나 불교같은, 생활종교로서 사람들의 삶에 종교적 신심을 부여하는 보통의 종교로서 존재하고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재일조선인의 입장에서는 이만큼의 고마운 종교도 없었던 듯 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북조선 정부나 한국정부보다도 허공에 떠버린 재일조선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운 존재도 없었던 듯 싶다. 종교는 힘없는 이들의 안식처라 생각할 때, 창가학회는 한때, 종교의 그런 의무를 다한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