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꽃들에게 희망을』과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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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꽃들에게 희망을』과 교육 -
『꽃들에게 희망을(Hope For The Flowers)』은 트리나 포올러스(Paulus, Trina)의 우화로써 1972년 출간된 이후로 스테디셀러로써 읽히고 있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겠지만 군대에 있을 때였다. 누더기처럼 생겼던 그 노란 책은 마치 진흙속의 진주처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군대 보급책자 안에 있었다. 두껍지 않은, 많지도 않은 그 책 안에 진주이상의 빛이 나는 것이 있음을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그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 역시 진흙의 일부로 본 것이다. 지겹게 반복되던 생활 속에 기둥위로 의미 없이 올라가는 애벌레의 모습이 내 모습과 같다고 느꼈을 뿐 난 그때 그 울타리 같던 생활 안에서도 더 멋진 ‘나비’로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과제 중 하나인 교육사상적 가치를 찾아 써야하는 과제의 제시 책 목록 중 오랜만에 이 책 제목을 다시 봤을 때 그때의 그 누더기 같던 노란 책이 생각났다. 하지만 도서관에서 찾아본『꽃들에게 희망을』은 그때의 누더기가 아닌 샛노란 예쁜 책자였다.
자연주의 교육사상과『꽃들에게 희망을』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그들이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주의(Naturalism) 교육사상을 읽을 수 있었다. 자연주의 교육사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자연에 일치하는 교육이다. 자연에 일치한다는 교육이란 인간의 발달을 자연의 법칙과 일치시키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주의 교육사상에서는 자연스런 감정이 지배하는 단순하고 자연스런 상태로 돌아갈 것을 바란다. 호랑애벌레는 노랑 애벌레가 그랬듯이, 그리고 노랑 애벌레는 늙은 애벌레가 그랬듯이 자신의 몸에 실을 감아 고치가 되고 그 고치가 되었음에 그들은 그들 안에 숨어있던 나비가 될 수 있었다. 이것은 그들이 자신의 본질에 따르지 않고 누구나 하기에 자신도 따라 올라가는 ‘기둥’에서 내려 왔을 때 가능한 일이었다. 올라가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짓밟는 그곳에서는 자신의 몸이 실을 뿜어 낼 수 있음을, 자신이 나비가 될 수 있음을 그들은 결코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자신을 자연의 법칙과 일치시켰을 때 그들은 나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참된 교육이란 무엇인가? 지식의 전도? 더 나은 대학으로의 진학? 내가 생각하기에 교육은 자신이 가진 내적 발전 가능성을 겉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교육을 의미하는 단어 ‘Education’은 라틴어인 ‘educare’에서 왔다. 이 말은 자신이 가진 재주와 능력을 끌어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발달 가능성을 가진 아동을 교사는 교육으로 그 잠재된 가능성을 실현시키며 더욱 발전 시켜주는 것이다.『꽃들에게 희망을』에서 노랑 애벌레는 자신이 실을 뿜어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게 된다.
“내 속에 고치의 재료가 들어 있다면 나비의 재료도 틀림없이 들어 있을 거야!”
나비는 자신의 안에 있는 나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고 자신에 대해서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주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자연주의에서는 아동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인간의 내적 가능성을 믿고 이를 조장·계발시키며, 사회생활에 필요한 지식, 기능, 태도를 신장시키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런 내적 가능성의 실현은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교육에 있어서의 교사는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 아닌 앞에서 이끌어 주는 사람이다. 아이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사람이 아닌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는 사람인 것이다. 강요가 아니기에 이런 가능성의 실현은 외부적 세력에 대한 반응이 아닌 내적인 ‘흥미’에서부터 출발한다. 두 애벌레는 단순히 나비가 되고 싶어 하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삶에 대해서 끊임없이 고민한다.
“삶에는 그냥 먹고 자라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지 않겠는가.”
이 호기심은 호랑 애벌레를 기둥에 올라가게끔 만들게 하지만 단순히 기둥에 올라가게만 하는 호기심은 아니다. 이 호기심에서 출발한 애벌레의 삶에 대한 궁금점의 발아(發芽)는 자신이 단순히 기어 다니는 애벌레가 아닌 그 무엇인가의 존재임에 대한 의문점을 낳게 하고 궁극적으로 그가 나비가 되게 해주는 것이다. 이런 노랑 애벌레와 호랑 애벌레에게 그 누구도 나비가 되어야 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각각 나비가 될 늙은 애벌레와 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는 하나의 ‘지표’로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만약 늙은 애벌레가 노랑 애벌레에게 나비가 되어야함을 강요했다면 노랑 애벌레는 ‘자신의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그 숨 막히는 고치 속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교사는 학습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 교사는 학습자에게 지식 획득에 대한 내적 동기가 주어졌을 때 즉, 자신이 걷고자 하는 의지가 생성 되었을 때 앞에서 길을 이끌어 주는 자(者)이지 뒤에서 앞으로 가도록 미는 자가 아닌 것이다. 여기서 학습자의 내적 동기를 중요히 여긴다는 것은 학습자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자연주의에선 이런 점에서 성선설의 입장에서 서 있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성선설만이 아닌 설사 그 아이가 선하지 않더라도 그 아이를 믿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가 선하지 않다면 그 배경요인을 찾아 그것을 바르게 고쳐 나아가는 것이 교육이며 그 변화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야 말로 아이의 내적 동기와 발달을 믿는 것이며 아이가 선하다는 것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그 아이의 내적 동기를 믿어 그 아이가 발달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가 그 자신의 속에 ‘나비’가 될 수 있는 선천적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믿는 것과 같다. 자연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필요활동경험지식’의 4단계 자연의 질서에 따른 교육을 제시하였다. 자신에 대한 궁금점으로 인한 내적인 흥미가 ‘필요’였다면 그 필요 다음의 활동과 그로인한 ‘경험’은 바로 자신의 내적 가능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지식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경험은 지식의 획득에 있어 제일 기초적이며 기본적인 것이다. 하지만 경험으로 얻는 지식은 단순히 책에서 얻는 지식 이상의 것을 가져다준다. 활동으로 인한 다양한 경험은 많은 내적 동기를 불러일으키며 이런 내적 동기는 새로운 ‘필요’를 가져다주게 되고 궁극적으로 더 많은 지식을 얻게 해주는 것이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기둥으로 올라 간 것은 분명 그들에게 많은 시련과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 기둥으로 올라갔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에 의문을 그리고 그곳에 아무것도 존재 하지 않고, 모두 다 올라가기에 올라간 그곳에 남은 것은 자신의 가치 실현이 아닌 남의 시선에 대한 허영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내려감’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의 경험은 헛되었던 것이 아니라 가치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소중한 경험으로 두 애벌레는 자신들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소중한 ‘지식’을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은 교육에서 얻고자 하는 궁극적인 것은 아니다. 루소는 교육의 목적을 지식의 획득이 아닌 자연히 능력을 신장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자연인-시민도 국민도 아닌 사회인의 반대개념으로 자신을 위하여 가치를 지닌 사람으로, 순수인 혹은 자연 상태의 평등인·자유인의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결국 애벌레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나비가 될 수 있다는 지식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자신을 위한 가치란 호랑 애벌레가 처음 자신에게 던졌던 질문인 ‘삶엔 그 무엇인가가 더 있다’라는 대답이다. 다른 애벌레가 단순히 기둥에 맹목적으로 올라가기만 원하고 있을 때, 그리고 올라가서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에도 내려오지 못하는 그 속에서 자신을 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위해 당당히 내려오게 하는 그것이 궁극적인 교육의 목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