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서평 -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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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서평 -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과 함께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성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서평
-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조론과 함께 보는 신학함의 측면들 -
Ⅰ. 들어가는 말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21C를 살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유명한 고전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과거(1-9)와 현재(10)에 대해 말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죄를 범했는지를 고백하고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식으로 그를 부르셨는지를 찬송합니다. 그 자신이 어려서부터 범죄 했다는 점, 마니교에 몰두하여 진리를 배척했던 일들, 마니교 권위자 파우스투스와의 대화를 갈망했으나 정작 대화를 하고 나서는 크게 실망했던 일, 신앙의 계승을 위한 어머니 모니카의 헌신, 회심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선히 간섭하신 일들에 대한 고백 등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기까지의 삶이 잘 나타납니다. 하나님과 자신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지한 고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고 신앙과 교회를 선택하는 일을 상품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리고 책의 종반부(11-13)에서는 창세기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를 살피며 그 의미를 설명합니다. 필자는 특별히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를 살펴보고 이에 비추어 재창조된 교회의 성도로서 하나님을 신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신학’이라는 단어를 명사가 아닌 동사적 어의로 사용하는 것은 다음을 참고하였습니다. 유해무, 신학 :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송영, (서울: 성약, 2007), 75.
Ⅱ. 본론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장 1절의 하늘과 땅을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상을 의미하는 하늘과,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만물을 의미하는 땅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 1장 1절은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대한 요약이 아니라 창조사역의 한 부분임을 알게 됩니다. 메리데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서막, 김구원 옮김, (서울: P&R, 2007), 50.
창세기 1장 2절은 무에서 유로 창조된 이 “땅”에 대해서 묘사합니다.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고 계셨습니다. 질서와 형체가 없던 “땅”에 질서가 생기고 채움이 발생하는 것은 사람이 쉽게 인식하는 이 세상의 창조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강현복, 땅 위에 아로새겨진 하늘나라, (경산: 도서출판R&F, 2011), 29-31.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장 1절과 2절에서 삼위하나님을 발견하고 찬양합니다. “하나님 이라는 이름 자체에서 아버지를, 태초라는 단어에서 아들을, 수면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신에서 성령하나님을 확인하며 삼위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선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김기찬 옮김 (고양: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12), 377
창조사역이 삼위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기초위에서, 땅(오늘날 사람들이 밟고 서 있는 대지가 아님)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수면위에 운행하고 계셨다는 내용은 창조와 재창조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를 함의하고 있습니다. 클라인은 모세오경에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히브리 단어 두 개를 통해 이를 설명합니다. 메리데스 클라인, 하나님 나라의 서막, 57-58; 메리데스 클라인, 구약에 나타난 성령의 형상, 서홍종 옮김 (서울: 도서출판 줄과추, 1999), 22-24.
창세기 1장 2절에서 사용된 단어 “혼돈”과 “운행하신다”는 단어는 모세오경에서 딱 두 번 사용되는데, 신명기 32장 10-11절에서 등장합니다. 개역한글 성경은 “혼돈”이라는 단어는 “황무지”로 “운행하신다”는 단어는 “너풀거리며”라는 의미로 번역하였습니다. “황무지”라는 단어를 직역하면 “혼돈 안에서”가 되는데 전치사를 빼면 동일한 의미입니다. 강현복, 땅 위에 아로새겨진 하늘나라, 32.
땅은 혼돈하고 공허했지만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품고 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무지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는데 그 과정 중에서 성령 하나님께서 보호하고 인도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날개 위에 업어가는 것과 같다고 묘사합니다. 신명기 32장은 증거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자손들에게 증거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역사를 노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창조 때 사용된 단어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켜 주고 계십니다. Ibid., 3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속에서 혼돈의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창세기에서도, 신명기에서도, 그리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서도 동일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삼위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을 지금도 품에 안고 계십니다. 그리고 새롭게 창조된 공동체인 교회로 불러내고 계십니다. 죄 아래 죽었던 백성들이 성령 하나님의 보호 속에서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재창조되는 것입니다. Ibid., 34
이로 미루어 보건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무지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은 큰 의미를 갖습니다. 사람은 창조의 비밀을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아 그분을 찬양하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 과정과 의미를 모두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를 찬양하는 모든 사람들이 처음부터 살아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땅이 혼돈하였던 것처럼 질서 없는 존재적 의미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보살피듯이 그들은 보살핌 받고 있었습니다. 오직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나 여전히 그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신학하려 할 때, 무엇보다도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삼위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삼위 하나님의 지혜의 일부조차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고백하면서도 그 정체성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무슨 이유로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도 오직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만큼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오직 삼위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을 신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