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역사스페셜3 - 조선시대 궁녀는 전문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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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역사스페셜3

궁녀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고려시대부터였다. 조선 초기에 구체적인 규정과 체제가 마련되었으며, 이때 정비된 궁녀제는 조건 말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궁녀란 좁게는 상궁(尙宮)과 나인[內人]을 말하고 넓게는 무수리 같은 하녀까지 포함된다.
궁녀는 대개 어린 나이에 뽑혀 궁에 들어왔는데 지밀은 4~5세, 침방과 수방은 7~8세, 그 외 부서는 13세 미만이었다고 한다. 왕을 측근에서 모시는 지밀은 궁녀의 대표 격으로 4세부터 궁중에 들어와 그 행동과 습관, 품격이 궁중화되어 왕자나 왕녀 못지않은 교양을 갖추게 된다고 한다.
궁녀들은 주로 왕실의 의식주에 관계된 일을 분담했는데 아침저녁 수라와 잔치 음식 등을 준비하는 일은 궁녀들이 맡은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대조전의 서쪽 행각 바깥에 있는 소주방(燒廚房)이 바로 임금의 수라상을 마련하던 곳이다. 수라상을 마련하던 궁중 나인들은 그 옆의 온돌방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주방은 내외소주방으로 나뉘는데, 내소주방은 평상시의 수라를, 외소주방은 잔치 음식을 만드는 곳이다.)
『실록』에는 태종 1년(1401) “태상전(太上殿)의 여관(女官)에게 월봉(月俸)을 주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궁녀들은 매월 쌀 3망, 그리고 매년 명주무명 각 한 필과 솜 10근, 여름철에는 베 모시 등을 지급받았다. 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된 1896년의 『궁중예산서(宮中豫算書)』에 기록된 “여관봉급(女官俸給) 이백사십 원(貳百肆拾元)”은 대전 소속 궁녀들에게 지급할 봉급 총액인데 이때는 궁녀들이 돈으로 월급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궁녀는 여성에게 관직이 열려 있지 않던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나라로부터 월급을 받는 여성 공무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어려서부터 궁궐에 들어와 왕실을 대상으로 맡은 바 소임을 체계 있게 익히고 개발한 전문직 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궁에 갓 들어와 생머리를 묶은 어린 견습나인을 ‘생각시’라 불렀다. 생각시는 머리를 곱게 빗어 뒤에서 두 가닥으로 땋아 말아 올려 뒷머리 밑에 나란히 붙여 묶었다. 그 위에 댕기를 늘이고 노랑 저고리에 남색 치마를 입고 다녔는데, 입궁한지 15년이 되어 나인이 되면 머리 모양이 달라진다. 머리를 얹어 쪽을 지고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를 입는다. 일반 나인에서 다시 15년이 지나면 상궁이 된다. 상궁들은 옥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고 머리 장식인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다. 그렇게 네다섯 살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나 낯설고, 엄한 궁궐에 들어온 어린 궁녀는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내고서야 상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입궁한지 15년이 지나면 견습나인들은 관례를 치르고 정식나인이 되어 본격적인 궁녀의 길에 들어선다. 본래 성인으로 독립하는 것을 의미하는 관례는 궁녀에겐 사실상 혼례이기도 했다. 평생 왕을 위해 살아야 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왕에게 시집가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내가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가난한 백성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고 남녀평등의 시절도 아니었던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나 역시 궁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극드라마를 보게 되면 항상 생각을 하게 된다. 왜 궁녀들은 왕을 위해 살까? 왕의 승은을 얻지 못하면 출세를 할 수 있는 것도, 부자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왕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수도 없이 품었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대충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대략 예전의 화폐와 지금의 화폐의 가치를 정확히 환산할 수는 없지만 대략 그 때에 지급 받았던 봉급은 연봉 200만원 이내의 안팎일 것이다. 그때의 화폐가치라면 어마어마한 돈인 것이다. 지금이나 예나 못 사는 사람들은 많았을 것이며 집안 사정이 좋지 않으면 부모들은 어쩔 수 없이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어린 딸을 창살 없는 감옥이었던 궁궐로 밀어 넣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