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구] - 김일성 리더십 연구 -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체계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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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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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일성 리더십 연구
1. 내용 요약
이태섭의 김일성 리더십 연구는 수령 체계 형성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다. 특히 1956~1967년까지 역사 중 두 번의 경제 위기를 중심으로 수령 체계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있는데 본 저작의 4장에서 6장까지는 1960년대의 경제 위기와 수령제와의 관계를 주로 다루고 있다. 1960년대 북한 경제의 한계가 표출되기 시작했는데 이는 외연적 성장 방식의 한계에 따른 경제 효율성의 저하로 나타났다. 제1차 5개년 계획 기간(1957~1960)동안 북한은 높은 경제 성장률을 기록하였지만 이는 자원 투입량의 증대, 즉 외연적 성장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나 1959년 하반기를 지나 내부 예비가 고갈되고 자원이 부족해지면서 북한의 성장률은 둔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1960년대 들어 원자재 생산에 대한 투자 증대 및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기술 혁신과 생산 조직 혁신을 추구하였다. 특히 행정 경제 사업에 대한 당적 통제가 강화되고 생산 조직 사업에 대한 당 조직의 역할이 강화되었다. 1961년 12월 북한은 대안의 사업 체계를 도입하여 생산 조직 사업을 개선하기 위해 새로운 경제 관리 체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는 외연적 성장 방식을 추구하는 행정 관료 조직과 개별 기업의 소극 보수 경영과 관료주의, 조직 이기주의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안의 사업 체계는 생산 지도에 역량을 집중하여 모든 예비를 남김없이 동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며 공장당위원회가 당과 대중, 행정기술 역량을 통일적으로 장악 지도하는 체계였다. 경제 기술 사업보다 정치 사상 사업을 앞세우며, 국가의 경제 기술적 지도보다 당의 정치적 지도를 앞세우는 원칙을 제도화 한 것이다. 또한 대안의 사업 체계는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강화하고 통일적이고 종합적이며 집중적인 생산 지도 체계를 확립하였다. 그리고 기업 관리에 있어 궁중 노선을 제도화하여 생산자 대중을 기업 관리에 직접 참가시키는 새로운 경제 관리 체계였다. 즉, 위로부터의 당적 지도와 아래로부터의 대중의 자발성을 결합기켜 중간 관료 조직에 의해 당 정책이 하부에서 행동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관료적 제약을 극복해 보고자 하였다. 대안의 사업 체계는 상호 동지적 협조와 단결에 기초한 집단주의 원리를 구현한 것으로 이상적인 것이었지만 공산주의 의식과 집단주의 사상이 부족할 경우 현실성을 결여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자원의 효율적 이용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방법은 기술 혁신이었다. 기술 운동은 과학 기술 발전을 자력 갱생의 혁명 정신과 밀접히 결부시켜 진행하는 것과 전인민적 운동으로 기술 혁신을 추구한다는 것이 원칙이었다. 북한의 기본 방침은 당성, 즉 홍과 결합된 붉은 기술자 및 전문가를 육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술자, 전문가 수의 급증에도 불구, 1960년대 북한 기술 혁신의 성과는 미약했다. 또한 생산자들의 소극성과 보수주의, 조직 이기주의는 사라지지 않았고 국가와 개별 생산자 모두 효과성을 추구하면서 효율성은 저해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1960년대 북한 경제는 자원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면서 외연적 성장 방식이 한계에 봉착하고 생산 조직 및 기술 혁신을 통한 내포적 성장 역시 한계에 직면하면서 생산의 파동성이 증대되고 설비 이용률이 저하되었으며 그 결과 노동 생산성과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북한과 소련의 갈등은 북한의 자원 부족 현상을 심화시켰다. 소련의 평화공존론, 코메콘 경제 통합 문제, 쿠바 사태, 중인 국경 분쟁 등 1962년에 발생한 일련의 사태는 소련에 대한 북한의 불신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독자 노선을 모색하게 되는데 1962년 10월부터 가시화되었다. 1960년대 북한 사회의 변화 발전 과정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대외적으로 민족적 자주성을 확립하고 대내적으로 민족적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주체사상이 정립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 자주성과 주체성 확립을 위한 북한의 투쟁은 경제적 희생이라는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다.
북한의 자립 경제는 대상과 범위가 점차 확대되었다. 1960년대 북한의 자립 경제 건설은 자기 완결적인 재생산 구조를 추구하여 사회주의 국제 분업을 점차 배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1960년대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과 갈등은 북한이 경제 자립성을 더욱 강화하도록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 압력을 동반한 소련의 경제적 압력과 그에 따른 대외적 자원 제약 상황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기 완결적인 재생산 구조에 바탕한 자립 경제 노선을 더욱 강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자기 완결적인 재생산 구조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북한 경제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자립 경제의 경직성을 야기하여 북한의 경제 성장률 둔화로 이어졌다. 자력 갱생은 자립 경제 노선에 따른 정책적 제약 및 외화 부족 같은 현실적 제약에 근거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의 자립 경제 노선은 대외 경제 협력이 가능한 정책적 공간을 계속 확대해 나가는 경향을 보였다.
1960년대 북한의 자원 부족 현상을 심화시킨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1963년부터 본격화된 북한의 자주 국방 노선이었다. 1960년대 북한의 국가 예산 지출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계속 증가되었다. 또 경제-국방 병진 노선에 따라 군사적 효과성이 강조되면서 생산력 배치 등 민수 경제에서 경제적 효율성도 제약되었다. 1960년대 북한 경제 침체 근본 원인은 계획 경제 자체의 내적 한계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소련의 경제적 압력과 북한의 자립 경제 노선 및 자주 국방 노선은 북한의 자원 부족 현상을 결정적으로 악화시키면서 북한 경제를 위기로 몰아갔다. 북한의 자주 노선에 따른 경제 희생은 1963년부터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경제성장률이 크게 둔화되었고 농업에서도 경제 위기가 나타났다. 북한 경제는 1963년 이후 침체되기 시작하여 공업 생산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한 1966년에 최악의 상황에 처했다.
경제 효율성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1963년 이후 계속되는 경제 침체 현상은 축적 규모와 축적률 증대로 극복해야 했다. 북한 경제에서 축적(고정 자본과 유동 자본)은 국가 축적과 기업소 축적으로 구성되며 국가 축적은 국가 예산 가운데 인민경제비와 사회문화비 항목으로 집행된다. 1960년대 북한 국민 소득, 재정 부담률, 국가기본건설비 투자율을 살펴보면 국민 소득에서 국가기본 건설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64년 이후 꾸준히 증대되어 축적률이 증대되었다. 효율성이 저하되는 상황에서 경제 성장을 위해 축적률 증대가 필요했고 이를 위해 국가 예산 증대 즉, 재정 부담률 증대가 필요했다. 이와 같은 재정 부담률과 축적률 증대는 국가 예산으로의 국민 소득 집중, 즉 생산 자원에 대한 국가적 중앙집중성 강화를 의미하며 이는 곧 경제 활동에 대한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 강화, 결국은 권력의 중앙집중성 강화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재정 부담률과 축적률 증가, 생산 자원의 중앙집중성 강화는 곧 기술 혁신의 한계를 반증하는 것이었다. 1960년대 국가는 자원 이용에 있어 기술적 효율성과 내포적 성장을 위해 생산자들에게 기술 혁신을 요구했지만 생산자들은 외연적 성장을 추구하고 기술 혁신에 무관심하면서 경제 효율성이 저하된 것이다. 생산 자원의 중앙집중성 강화에 기반한 수령 체계 성립은 생산자들의 자율성과 창발성을 더욱 약화시키고 생산자들에 의한 기술 혁명을 더욱 제약하는 등 모순의 악순환이 지속되었다.
자원의 국가적 중앙집중성 강화를 통한 축적률 증대는 소비율 감소를 가져왔다. 국민 소득에서 축적 기금 증대는 소비 기금 감소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경공업에 대한 투자가 감소되고 근로자의 임금은 동결되었다. 1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점차 완화되어 가던 소비재 부족 현상은 1960년대 들어 다시 누적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들어 다시 누적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일반적으로 사회주의 국가에서 농업은 공업화를 위한 중요한 축적 원천이었고 북한은 ‘농촌 테제’에 입각하여 농민들에 대한 사상 교양 사업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특히 농업에 대한 투자를 더욱 증대하였다. 그러나 1964년 이후 농업에 대한 투자 증대와 물질적 유인 증대에도 불구, 1960년대 중반 북한의 농업 생산은 여전히 침체되어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북한은 작업반 우대제를 유지하면서 생산과 분배의 기본 단위를 기존의 작업반에서 분조로 축소하는 ‘분조관리제’를 도입하였다.
1960년대 투자 효율성과 노동 생산성 저하에 따른 경제 성장률 둔화는 북한 뿐 아니라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일반적 현상이었다. 경제 효율성 저하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의 내적 한계에 기인하는 것이었는데 이 한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각국마다 다른 발전 전략을 모색하면서 분열되기 시작한다. 소련은 당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실용주의적 경제 개혁을 선택하였다. 반면 중국은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계급 투쟁을 공산주의 건설의 기본노선으로 하여 이데올로기를 절대화하면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북한은 소련의 실용주의적 노선이나 모택동의 급진적인 유토피아 노선과 달리 일종의 절충주의로 공산주의적 인간(의식) 개조와 생산력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였다. 북한은 이데올로기적 목표를 우위에 두고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절대화한 바탕 위에서 생산자들의 경제활동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해 나간 것이다. 북한은 1964년 계획의 일원화 체계를 도입하여 개별 기업에 대한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는 계획 수립에서 국가의 중앙집권적 통제 강화를 통해 생산자들의 조직 이기주의와 지역 이기주의, 소극 보수성을 극복하고 적극적이고 동원적인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군중 노선을 통해 구각 계획 기관의 주관주의와 관료주의를 극복하고 계획의 현실성과 객관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위와 같이 국가 유일 계획 체제가 확립되면서 경제 유기체 개념이 발전하였다. 이는 생산자들의 모든 경제활동을 세부에 이르기까지 빈틈없이 계획화, 조직화하여 하나의 생명 유기체와 같이 일치되게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당과 대중의 통일 단결은 북한의 일관된 정치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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