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주의 연구] 신비주의의 구원관- 구원관과 내세관, 힌두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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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비주의의 구원관
제1장 『Prayer』에 설명된 신비주의적 종교의 구원관과 내세관
신비주의의 구원은 세상과 생명체, 모든 비-존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해방을 통해 유일한 진정한 존재에 이를 수 있다. 이는 신성(Divine)과의 합일을 의미하는데, 이를 위해서 인간은 도덕의 덮개들을 벗겨내고 유한과 무한의 간극을 제거하고, 존재를 부인해야 한다. 이 무아경의 합일이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독특한 이상, 즉 구원이다.
그러나 이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매우 힘들고 어렵다. 이 무한한 이상에 다다르기 위해 인간은 아찔한 높이까지 이어져있는 구원의 사다리를 단계적으로 올라가야 한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의 일반적 특성인 신플라톤주의 규범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단계로 성결(Purification)-조명(Illumination)-연합(Union)을 이야기하며, 이는 불교의 신비주의적 단계들(도덕성(Morality)-참선(Meditation)-득도(Knowledge))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불교도들은 여기에 네 번째 단계를 추가하고 있는데 이것이 초월(Deliverance) 또는 열반(Nirvana)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구원의 과정은 매우 고통스러운 노력의 연속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의 극도의 노력과 함께 신의 은총 역시 필요하다. 더 높은 신비의 단계에 이르기 위해서는 계속적인 고행이 요청되지만,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영혼의 현상들은 인간의 노력이 아닌 신의 활동이다. 자력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불교조차도 조명과 열반을 놀랍고도 은혜로운 “준 사람이 없는 신성한 선물”로 생각한다.
신비주의의 내세개념은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인 특징을 가진다, 신비주의의 영원한 구원과 축복은 현세에서 가졌던 최상의 경험(황홀경의 환상, 무아경의 합일, 열반)의 영속이다. 육체의 족쇄에서 해방되고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은 영혼은 강한 신비적인 상태속에 머무를 수 있다. 이 영혼은 영원한 쉼과 극도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거나, 황홀경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지고의 선을 보며 신성과 합일한다. 내세에서의 완전의 상태는 현세의 신비경험과 일치한다. 신비주의의 영생은 신, 그리고 신과의 일치에 대한 영원한 환상이다. 인도의 신비주의에서 현세의 황홀경과 열반은, 내세의 천상의 황홀경과 열반에 대한 미리 맛보기이다.
제2장 『Prayer』에 설명된 예언자적 종교의 구원관과 내세관
신비주의적 종교의 구원과 비교하자면 예언자적 종교의 구원은 훨씬 단순하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신과의 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신과의 영적관계는 자아의 무가치함과 신의 의지의 가치있음 사이의 깊은 골을 이어주는 교량이며, 이는 “구원”, “용서”, “의로움” 속에 있는 신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구원은 인간의 노력, 심지어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적 노력에 의해서도 얻어질 수 없다. 구원은 신적 은혜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인간은 그 자신의 힘으로 기쁨에 찬 양심과 확신이라는 생동하는 감정을 얻거나 재생시킬 수 없다. 이는 영혼 속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다.
루터에 따르면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믿음이며, 믿음만이 유일한 확실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떠한 인간적 노력이나 행동도 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믿고, 신뢰하고, 받아들이고, 감사할 수 있을 뿐이다.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예수의 대속은 역사적이고 구원적인 사실이며 위대한 기독교의 종교인들은 이에 집착한다. 이는 이 예수의 사건이 신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정당화하는 객관적인 보증이 되기 때문이다. 도덕적 이상과 인간의 도덕적 나약함 사이에는 항상 불일치가 존재하지만, 이 불일치는 믿음이라는 창조적인 행위에 의해 극복된다.
예언자적 종교에서의 내세는 개인적이면서도 초-개인적이다. 예언자적 종교에서도 신적 축복의 상태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바라고 있다. 경건한 인간은 구원과 도움의 신을 신뢰하고 믿으며, 그와의 개인적이고 생생한 연합 속에 있으면서, 필멸의 운명을 극복한다. 경건한 인간과 신의 동행은 영원히 지속된다. 그러나 예언자적 믿음의 내세는 개인적인 영혼의 축복에 한정되지 않는다. 미래에 대한 예언적인 믿음은 개인적인 희망인 동시에 선의 최후 승리에 대한 희망이다. 죄와 고통, 죽음과 악이 지배하는 이 세상은 결국 멸망할 것이며, 그 자리에 악의 모든 세력이 무로 돌아간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 신은 모든 악에 대하여 승리를 누리며 왕으로서 통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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