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와 안락사에 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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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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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낙태와 안락사에 관한 고찰
1. 낙태의 일반적인 개념
출생의 과정 중에 산모가 아이를 유산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자연적인 원인에 의한 것과 인위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 있다. 이중 인위적인 방식에 의한 유산을 인공유산, 흔히들 낙태(落胎; 落 : 떨어질 락, 胎: 아이밸 태)라고 부르고 있다. 이처럼 인공유산이란 태아가 모체 밖에서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기 전에 인위적으로 임신을 중절시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인공유산이란 자연분만에 앞서 고의로 태아를 모체 밖으로 내 보내는 것을 말한다.
자연유산은 일반적으로 자궁의 해부학적 문제점이나 자궁경부의 해부학적 문제점 또는 호르몬 결핍, 부적합한 혈액형, 습관성 유산 등의 원인으로 인한 유산을 말하며 반면에 인공유산이란 태아가 생존능력을 갖기 이전에 의도적으로 태아를 제거함으로써 임신을 중단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낙태의 역사 및 배경
서구의 기준으로 볼 때 역사적으로 두 번(첫 번째는 그리스 로마시대와 초기 기독교 시대이고, 두 번째는 19세기 중반의 미국 사회에서)에 걸친 낙태 찬반 전쟁이 있었고(낙태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논쟁이 아니라 사악한 인본주의적 유물론과의 전쟁이다, 지금 세 번째 전쟁이 진행 중이다.) 흔히 낙태가 현대에 와서 시행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고대 그리스와 로마시대는 낙태와 유아살해를 상당히 허용하였다. 플라톤(Platon)은 [공화국(Republic)]에서 어머니가 40세 이상이면 낙태, 영아살해(infanticide)를 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가족수가 일정한 수를 초과하면 낙태를 의무적인 것으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를 formed fetus와 unformed fetus로 구별해 남아의 경우 임신 40일 후로 여아의 경우 90일 이후로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이는 도덕적이 아닌 형이상학적 구별로 formed, unformed fetus 모두를 낙태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나중에 일부 기독교인들(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 구별을 채택했으며 이것이 현재 임신을 임의로 3기로 구분하는 기초가 되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아가 출생 이전에도 생명이 있다고 믿었으나 사회와 가족의 복지가 태아의 생명권보다 더 중요하다고 하였다. 로마는 생명은 출생 시부터 시작한다는 스토아 학파의 견해를 따랐다. "로마는 가족 우선 주의였지만 근본적으로 반낙태 입장은 아니었다. 로마법상 태아는 인간(person)이 아니며, 출생한 아이들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나 가족, 심지어 로마제국에 유용도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되었다.") 반면 기독교도들은 태아를 어머니의 신체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보아 클레멘트, 터툴리안, 제롬, 바질, 암브로스 등은 낙태를 분명하게 반대했다.
이런 상반된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신앙으로 로마제국을 정복하였고 오늘날 서구 사회에 낙태 반대 전통을 이어오게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합법화한 지 얼마 안 되어 로마에서는 아버지가 자녀를 죽이는 것이 불법화되었으며, 로마의 낙태법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으나 교회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짐에 따라 낙태를 살인으로 여기는 것이 사회 전체적인 법이 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양에서는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반해 식량생산은 산술급수적으로 증대할 것이므로 빈곤은 필연적이라는 "인구론"이 대두되고 산아제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또한 산업화 이후 여성들의 노동력이 대거 동원되고, 여성은 남성에 비해 하위라는 개념으로 이중, 삼중으로 착취당하는 삶을 감내해야 하게 되자, 무릇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각성이 싹트게 되었다. 19세기 내내 낙태는 법률로 금지되어 있었으나, 매춘과 마찬가지로 공공연히 행해지기에 이르렀다. 이에 종교계와 의학계 일각에서 거센 비판이 일어났고 사회적으로 낙태에 대한 찬반양론이 팽팽하게 대립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낙태를 유도한 죄는 살인이 아니라 상해의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대부분의 내용상 임부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체벌을 하는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낙태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이렇게 유발된 낙태로 인하여 임부가 죽은 경우에 한해 살인죄를 적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3. 낙태에 관한 규정 및 입법 동향
(1) 낙태에 관한 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