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연구] - 김일성 리더십 연구 - 수령 체계, 북한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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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 연구] - 김일성 리더십 연구 - 수령 체계, 북한의 경제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김일성 리더십 연구
1. 내용 요약
이태섭의 김일성 리더십 연구는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북한의 독특한 사회 시스템인 수령 체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평가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쓰여졌다. 저자는 북한 역사를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 통일 단결과 집단주의였으며 이것이 김일성 유일 영도 체계, 즉 수령체계로 귀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특히 어떤 요인에 의해 1967년이라는 특정 시점에서 수령 체계가 성립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 분석에 집중하고 있다. 이를 통해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키고 북한 체제 변화 동인의 방향을 정확히 규명하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저자는 수령 체계 형성의 사회 경제적 배경을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으며 1956~1967년까지 역사중 두 번의 경제 위기를 중심으로 수령 체계의 역사적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있다. 김일성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기본 추동력을 물질적 유인이나 계급 투쟁이 아니라 사상혁명을 기축으로 한 당과 대중의 통일단결, 일심 단결 즉 단결의 정치에서 찾았다.
저자는 북한 체제의 성격과 성립 요인에 대한 기존 연구인 가번 맥코맥의 신전체주의론, 브로스커밍스의 조합주의 모델, 와다 하루키의 유격대 국가론 등에 대한 한계를 지적하면서 수령 체계의 완성 과정과 김정일 후계 체계의 확립 과정을 상호 연관시켜 수령 체계의 구조와 특성을 분석하고 있는 김광용의 논문에 주목한다. 저자는 북한의 수령체계가 비공식화된 개인적 리더십을 배격하고 공식화된 규범과 절차에 기초한 조직적, 제도적 리더십을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분석을 위해 북한 내부로부터 북한을 설명하는 내인론적 방법을 쓰고 있다.
저자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 하에서 모든 개인과 집단의 보편적이며 일반적인 이익으로서 사회적 공동 이익과 모순되는 개인과 개별 집단의 개별적 이익행동과 이익 갈등을 북한 경제 침체와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분석한다. 사회주의 사회는 사회적 이익을 우위에 두고 사회적 이익의 목적 의식적인 추구 행위의 결과로서 개인적 이익의 증진을 추구하며 집단적 합리성을 우위에 두고 이에 기초하여 개인적 합리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사실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개인의 의식과 행위는 여전히 개인적 이익과 합리성을 우선시하는 개인주의에 의해 지배된다. 그 과정에서 사회적 이익, 집단적 합리성, 집단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새로운 사회 제도(사회주의 계획 경제 제도)와 개인적 이익, 개인적 합리성, 개인주의에 의해 지배되는 개인의 행위 사이의 근본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 저자는 1950~1960년대 북한 경제 ‘침체’의 원인을 상기 모순에서 찾고 있으며 계획 경제 제도와 행위 주체 사이의 모순과 갈등(내인), 계획경제 외적 요인(외인)의 복합적 작용의 결과로서 1950~1960년대 북한의 경제 위기를 분석한다. 이런 경제 위기로부터 북한의 사회갈등과 정치 갈등(당내 갈등, 당-정 갈등)을 분석하고, 그 귀결로서 사회 제도 변화를 설명한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회 변화와 경제 발전은 이데올로기적 목표와 현실적 제약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공산주의적 사회변화와 경제 발전의 동시 추구는 심각한 모순과 갈등을 내포한다. 이러한 내용을 전제로 저자는 북한의 수령 체제가 어떠한 역사 과정을 거쳐 성립되었는지 살펴본다.
「김일성 리더십 연구」 2장에서 우선 축적 위기에 대해 설명한다. 1953년 8월 당 중앙위원회 6차 전원회의에서 1956년 8월 전원회의까지 전후 경제 발전 전략을 둘러싼 당내 정책 갈등이 전개되었다. 김일성 계열은 중공업 우선 노선과 급속한 농업 협동화 정책을, 소련파와 연안파는 인민 생활 향상과 경공업의 우선적 발전을 주장하였고 이는 축적 위기로 이어졌다.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에 따라 국가 주도의 급속한 공업화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여기엔 막대한 축적 자금이 필요하였고 북한 내부의 자본 축적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경공업과 농업이었다. 북한의 국가 예산 수입은 거래수입금과, 국가기업이익금, 기타 조세 수입이 있었는데 경공업은 공산품의 생산과 판매를 최대한 증대시켜 거래세(거래수입금)와 이윤(국가기업이익금)을 통해 자본 축적과 중공업 발전에 기여해야 했다. 또 다른 내부 축적의 중요한 원천은 농업이었다.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경제 잉여유출은 조세(직접세) 징수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그런데 북한 국가 예산 수입에서 조세(직접세) 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은 연차적으로 감소되었으며 농업 부문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농업에서 공업으로 경제 잉여 유출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제는 농산물에 대한 국가 수매였다. 농산물이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으로 수매되어 도시 근로자에게 공급되어 농산물의 실제 가치와 수매 가격 차이만큼 도시 근로자의 낮은 임금을 통해 원가 저하를 가져오고 그 차이만큼 공업 생산물의 이윤 증대를 가져오는 것이다. 중공업의 우선적 발전 노선에 따라 투자 순위에서 밀려난 농업과 경공업이 자본 축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축적 증대를 위해서는 농업 생산력 증대가 필요했고 김일성은 급속한 농업 협동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빈농에게 유리했던 농업 협동화를 통해 빈농이 북한 농촌 핵심 주도 세력이 되었고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기반이 되었다. 또한 농업 협동화는 농업 생산력 발전 뿐 아니라 급속한 공업화를 위해 시행되었다. 그러나 급속한 농업 협동화와 무리한 곡물 수매 사업에 대한 농민 불만이 가중되면서 당내 정책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러나 1955년 4월 전원회의를 통해 김일성의 중공업 우선 노선이 승리하였으며 김일성은 당의 통일과 단결을 강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농업 협동화 운동은 자본 축적의 위기를 잉태하는 과정이었다. 급속한 공업화 정책은 축적 증대를 요구하였고 제1차 5개년 계획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외국의 원조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 북한의 중공업 우선 노선에 대한 소련의 압력과 간섭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조 감소는 불가피하였고 또한 농업 협동화 운동과 그에 따른 농민들의 반발은 축적 위기 요인이었다. 특히 노동자, 농민 불만과 당내 정책 갈등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비 기금 증대를 통한 인민 생활 향상에 관심을 기율여야 했으며 이는 거래수입금 증가율 둔화와 국가기업이익금 절대액 감소로 이어져 축적 위기로 연결되었다. 즉 사회 분열과 갈등 속에서 당내 정치 갈등과 경제 위기가 상호 상승 작용을 일으키며 위기를 가중시켰다. 당과 대중의 통일 단결은 사회 정치 분열과 갈등에 따른 정치 비용을 최소화하고 자본 축적을 위한 정치적 요구였다. 결국 1957년의 경제 위기는 축적 자금 감소와 높은 성장 목표 사이의 모순이었다. 1956~1957년의 축적 위기는 근원적으로 국가기업이익금 감소에 있으며, 이는 소비 기금 증대를 상쇄하고도 이윤을 증대시킬 수 있을 만큼 공업 내부의 축적을 증대시키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본위주의’란 사회적, 국가적 이익보다 각 개인과 개별 집단의 개별적 이익을 우선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독립채산제’는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서 개별 생산자들의 이기적 동기를 자극하는 물질적 유인체계로 생산자들이 할당된 국가 계획 과제를 달성함에 있어 효율성과 수익성을 증대시키는 데 관심을 갖도록 물질적으로 자극하는 것이었다. 국가는 최소투입-최대산출이라는 효율성 증대를 추구하며, 개별 기업에 대해 기술 혁신과 생산 조직 혁신을 통한 원가 저하와 이윤 증대, 수익성 증대를 요구하였고 이를 위해 물질적 유인 체계로서 독립 채산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개별 기업은 최소 과제-최대 투입이라는 효과성을 추구하며 생산 자원을 과다 비축하고 자원 투입량의 증대를 통해 계획 과제를 달성하고자 하여 생산 조직 혁신과 기술혁신, 원가 저하와 이윤 증대, 수익성 증대에는 무관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축적 증대는 공업 외부로부터의 축적, 즉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지만 농업 생산력이 정체된 상황에서 임금과 곡물 수매 가격은 계속 인상되었고 소비재 소매 물가는 인하되었다. 임금 인상은 국가기업이익금을 감소시키고 협상가격차 축소는 거래수입금의 증가율을 둔화시켰으며 대외원조 수입은 감소되고 있었으므로 축적 위기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최소 자원 투입(절약)으로 최대 산출(증산)을 추구해야 했고 1956년 12월 전원회의에서 “내부 예비 동원”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국가 행정 관료와 관리 기술자들은 투자 증대 없는 증산은 불가능하다며 김일성의 속도에 반발하여 당-정 갈등으로 이어졌고 8월 종파사건에 이어 김일성의 리더십이 도전에 직면하였다.
중앙당 지도부는 절약과 증산 및 내부 예비 동원 방도를 생산자 대중과 직접 토의해 보기로 하였고 당위원회는 중앙당 집중 지도사업과 현지 군중 토의를 조직, 지도하여 전인민적인 사상 동원 사업을 전개하였다. 당적 지도와 대중의 결합을 통해 북한 역사에서 가장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가져온 ‘천리마운동’이 시작된 것이다. 1957년 이후 북한 사회는 대중 운동을 통해 축적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기존의 사회 체계와는 성격을 달리하면서 근본적으로 재편성 되는데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당-정 관계 변화였다. 우선 천리마운동 이전 시기까지 경제관리 시스템을 중심으로 1950년대 초중반 북한의 당-정 관계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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