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철사 레포트 - 퇴계 이황의 생애와 교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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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철사 레포트 - 퇴계 이황의 생애와 교육사상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교철사 레포트
- 퇴계 이황의 생애와 교육사상 -
Ⅰ. 나 그리고 교육
오늘날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 정책을 추진한 결과 서구의 새로운 문화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물질 문명의 풍요 속에서 정신문화의 빈곤, 이기주의의 만연, 인간서의 상실 등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현대 사회의 몰 인간화 현상은 교육현장인 학교 사회까지 널리 파급되고 있으며, 교육의 제반 문제에 관한 견해도 일치되지 않고 있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해 덕성함양 아니면 지력향상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일치된 견해가 없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교육계가 강구해야 할 당면과제는 한국인의 삶의 뿌리 속에 깃든 인간주의 적 교육원리를 찾아내는 것이라 하겠다. 1960년대 한국은 서구 세계에 대한 경제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화산업화를 추진하면서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이 충돌하는 과정을 겪었다. 서구세계의 경제력이 도덕적문화적 우위의 표현, 미덕의 증거로 간주되면서 무비판적으로 서구의 생활 방식과 가치관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규율, 가족적 유대, 근면, 집단주의, 절제 같은 전통적 가치관은 무시되고, 방종, 권위에 대한 경멸, 개인주의, 이기주의와 같은 서구적 가치관이 보다 중요시 되어왔다.
이와 같은 서구적 가치관은 사회 전반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았지만, 1980년대 고속 성장이라는 경제적 성공을 거두면서 전통문화의 고유성을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경제 발전을 성취하고 거기서 이득을 보는 주체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경제적 이익을 지속적으로 증대시키기 위한 최선의 방안은 전통적 가치관을 재확립하는 교육의 정상화일 것이다. 즉 산업화도시화를 추진하면서 편중된 지식을 획득하기 위한 수단과 기능 위주의 교육적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형성 그 자체와 가치실현이라는 인간교육, 즉 전인교육에 눈을 돌려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생 동안 ‘경(敬)’을 통한 사람됨의 가치를 추구하여 한국 교육의 사표로 추양되는 퇴계의 교육사상을 살펴보자 하였다. 퇴계의 교육사상은 한국 교육사상의 정통일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전통 교육을 올바로 이해함과 동시에 인간 교육과 근본적인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환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류의 미래 사회는 가속화된 과학기술의 발달로 더욱 복잡해질 것이며, 급속히 확산되는 정보화 물결은 가족적 유대, 규율, 헌신, 근면 등의 도덕적 인간성을 도외시하거나 정신적 경직화를 초래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유교적 가치관을 토대로 가족 질서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자기수양과 도덕적 성찰을 중시하였던 퇴계의 교육사상을 통해 그 대안을 제시해 보는 것도 의미로운 작업의 하나라 생각된다.
Ⅱ. 글로 쓴 퇴계의 초상화
퇴계는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진성 이씨 처의 아들로 연산군 7년 11월 25일이다. 아버지는 이때 40세, 어머니는 32세, 위로 형이 여섯, 누이가 하나인 7남 1녀 중의 막내 아들로 탄생한 퇴계는 난지 7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이었다. 그래서 여러 자녀들을 키우는데 남달리 고생을 하게 된 것은 그 어머니였고 더구나 교육에는 힘들었던 것이다. 그때 맏형만이 결혼을 했었고 나머지 6남매는 모두 어린 것 들이라 이것을 양육하는데 홀어머니 손으로는 힘에 경운 일이었다. 몸소 농사를 짓고 양잠에 힘써서 어려운 집살림을 꾸려 나갔다.
6세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는 것으로 학문을 시작한 퇴계는 12세부터 숙부 송재공 우에게 논어를 비롯한 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14세에 이르러서는 비록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일지라도 반드시 벽을 향하여 조용히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학구열이 높아갔고 20세 경에는 마침내 침식을 거의 잊어가며 독서와 사색에 잠겼다 이때의 무리한 공부가 결국 몸이 야위는 일정의 소화불량증이 되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힌다.
퇴계 문집에 의하면 그의 모친이 자식들에게 훈계하기를, “문예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과 행실을 더욱 삼가라”라고 하였다. 이러한 모친의 영향을 받아 퇴계의 학문과 인격은 고매한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의 사상은 대체로 이기와 자연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12세 때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제자는 집에 들어오면 효도하고 나아가면 공경해야 한다는 말에 이르러 척연히 스스로 경계하여 사람의 자식 된 도리로서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또 하루는 이(理)자를 가지고 숙부에게 묻기를 “무릇 일의 옳은 것이 이(理)입니까?”고 하니 숙부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미 글 뜻을 이해하였다”라고 하였다 한다. 또한 14세때 도연명의 시를 매우 좋아했고 그의 사람됨을 흠모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그는 경서 만을 공부한 것이 아니라 시문학에 관한 작품을 많이 섭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율곡도 퇴계를 인문입도라 하였으니 초기에는 문장학에 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