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의 문학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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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고산 윤선도의 생애, 윤선도의 문학사적 의미)에 대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고산 윤선도
1. 고산 윤선도의 생애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이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게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하였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병진소 (丙辰疏)〉를 올려, 이로 인하여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견회요 (遣懷謠)〉5수와〈우후요(雨後謠)〉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여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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